옛 신문서 독립운동 확인…최능진 선생 서훈 취득 박차
최능진 일가, 3·1운동 등 독립운동 참가…군자금 모금도
사업회 "최 선생 친인척 자료 바탕으로 추가 서훈 신청"
- 김민성 기자
(서울=뉴스1) 김민성 기자 = '이승만의 정적'으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일석(一石) 최능진(1899∼1951) 선생의 일가족 20여 명이 3·1운동에 참석했고, 흥사단 등 국내 독립운동단체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임시정부를 알리고 군자금을 모금해 전달하는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밝혀졌다. 난항을 겪고 있는 최능진 선생의 독립 서훈 심사에도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능진 선생 기념사업회는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미국서 발간된 신한민보, 일제의 재판기록, 국내 각종 신문 등 최 선생 일가족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수집해, 일가족이 다양한 독립운동 활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발굴했다고 1일 밝혔다.
최 선생은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에서 출생했다. 1917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안 선생이 설립한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하던 그는 1929년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돼 청년 계몽에 주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최 선생은 1948년 제헌 의회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 갑구에 이승만에 맞서 출마했다가 그의 눈 밖에 나 정부 수립 후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뒤 인민군에 의해 풀려난 최 선생은 서울에서 정전·평화운동을 벌이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친북 활동가로 몰려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1년 2월 총살당했다.
최능진기념사업회는 최 선생 일가족이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시장과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했거나 참가했다고 밝혔다. 또 비밀조직 대한애국부인청년단을 만들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1921년 3월쯤 '대한애국부인청년단사건'으로 다수 체포된 것으로 드러났다.
3.1운동 연구를 한 김정인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분과위원장은 "사천만세시위는 맹산만세시위, 제암리만세시위와 함께 대표적으로 일제의 유혈진압과 폭력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그 동안 학계에서도 주목을 해왔다"며 "다만 최 선생 형제 외에 일가들이 만세시위에 참가했고, 비밀조직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한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최 선생 작고 후 65년이 지난 2016년이 돼서야 그의 이적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그러나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경찰 출신 독립운동가 발굴에 나선 경찰청이 최 선생에 대한 서훈을 요청했지만, 심사는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38년 당시 최 선생이 일제의 군수품 구입 등에 쓰이는 자금인 국방헌금을 냈다는 기록이 걸림돌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대해 사업회는 "당시 국방헌금은 최능진 선생이 옥고를 치른 뒤 석방되면서 강제로 보석금 형태로 낸 것이라 일반 국방헌금과 같이 취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실제로 함께 국방헌금을 냈지만 조병옥·유기준 선생 등 13명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기념사업회는 최 선생의 서훈이 마무리되면 이번에 새로 발굴된 친인척 분들의 자료를 정리해 추가로 서훈을 신청할 계획이다. 최 선생의 아들인 최만립 기념사업회 회장은 "부친께서 친일경찰 청산하려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후에 당장 부친의 이적 혐의를 벗기고 서훈 신청에 주력하다 보니 다른 친인척 분들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 그동안 소홀했다"며 "선친이 무죄선고를 받은 후에 다각도로 자료를 수집, 조사해 관계된 분들의 행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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