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 칼럼] 인재가 떠나는 나라, 인재가 들어오는 나라
이재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얼마 전 미국 정부가 전문직 대상 H-1B 비자 발급 수수료를 1인당 1000달러에서 10만 달러(약 1억 4000만 원)로 100배 인상한다고 발표해 큰 소동이 빚어졌다. 심지어 매년 10만 달러씩 내야 한다고 발표했다가 파장이 심각하게 커지자 한 번만 내면 된다고 서둘러 정정했다. 직전에 벌어진 조지아주 한국 노동자 구금 사태의 충격이 채 가시기 전이라 한국뿐 아니라 세계가 모두 경악했다.
이민자에 대한 배타적 분위기가 서방세계 전반에 확산하는 중이라지만, 미국을 지금의 강대국으로 만든 핵심 동력이 해외의 유능한 인재를 차별 없이 받아들인 개방성인데, 그걸 망각하고 이런 일을 벌이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재가 떠나는 미국이 더는 패권국가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리라고 예견하는 이들이 많다.
미국이 자해에 가깝게 행동하는 동안 세계 주요국들은 미국이 쫓아낸 글로벌 인재를 붙잡으려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일본은 이미 인도와 인재 50만 명 교류에 합의했고, 특히 인도의 IT 우수 인재 5만 명을 수용하기로 했다. 2023년부터는 '특별고도인재'(J-Skip) 비자 제도를 시행해 글로벌 우수 인재를 유치하고 있다.
중국은 첨단 과학기술 청년 인재 전용의 'K비자'를 신설해 10월 1일부터 시행한다. 미국의 H-1B 비자 수수료 폭탄에 대응해 해외 유명 대학 STEM 분야 청년 인재에게 기존 비자보다 우대하는 조건으로 발급한다.
EU는 내후년까지 5억 유로(약 7800억 원)를 투자해 글로벌 우수 과학자 유치를 지원한다. 사우디, UAE 등 중동 국가들도 실리콘밸리 AI 인재를 데려오려고 세계 최고 수준의 보상을 제공한다. 한국도 이 대열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세계 각국이 온갖 달콤한 조건을 내걸고 글로벌 이공계 인재를 유치하려고 애쓰는데, 한국은 내세울 만한 장점이 뭐가 있을까. 근래 한류 유행으로 인해 한국 이미지가 좋아지고 찾고 싶은 나라가 된 건 사실이다. 잘 구축된 인프라와 안전한 치안 등도 매력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글로벌 이공계 인재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공계를 많이 지망하도록 여건이 조성돼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 문제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공계에 지망하기를 꺼리는데 해외 인재들에게 무슨 희망을 걸고 들어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관련해 얼마 전 SK하이닉스에서 있었던 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SK하이닉스는 올해 임금협상에서 임금 6% 인상과 함께 성과급 상한선을 폐지하고 매년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으로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올해 영업이익 전망치가 39조 원 수준이라고 하니, 직원들에게 최소 억대 이상의 성과급이 지급될 것이다.
근래 SK하이닉스의 성과급 지급이 합의되자 그 규모가 과도하게 크다고 걱정하는 여론이 일부 있었다. 그러나 발상을 바꿔보면 이런 파격적인 성과급 지급이 SK하이닉스는 물론 한국의 첨단 제조업 전반에 얼마나 큰 자극제가 될지 알 수 있다. 이미 SK하이닉스의 고액 성과급 지급으로 직원들의 사기와 자긍심이 크게 향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생에서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은 일리가 있고, 명예나 성취감 등이 삶의 중요한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충분한 경제적 보상 없이는 어떤 아름다운 말도 공염불처럼 들릴 수 있다. 한국에서는 기업 임원에게 10억 원 이상 연봉을 주는 건 이상하지 않아도, 엔지니어에게 고액 연봉이나 성과급을 주는 건 낯설게 여겨진다. 그러니 똑똑한 청소년들이 이공계 진학을 꺼리고 오로지 의대나 치대에 가려는 꿈을 꾼다.
만약 SK하이닉스 같은 사례가 많이 나온다면, 그래서 이공계 대학을 나와 엔지니어가 되어도 수억 원의 연봉과 성과급을 받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면, 청소년들은 시키지 않아도 이공계 진학의 꿈을 꿀 것이다. 근래 서울대 공대 학장이 국가 주도 혁신연구원을 만들어서 5억 원 이상의 연봉과 주택을 제공하자고 제안했는데, 이런 파격적인 제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때다.
중국은 AI와 첨단기술 경쟁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미국의 빅테크 기업처럼 핵심 인력 한 명 스카우트하는데 1000억 원 이상 제시하지는 않지만, 최고 수준의 개발자들에게는 10억 원 이상의 연봉과 성과급을 과감하게 투자한다. 로봇 산업을 선도하는 유니트리의 CEO가 "로봇과 AI 인재는 늘 부족하다"라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은 유능한 글로벌 인재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렇게 중국으로 흡수되는 글로벌 인재 중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한국 엔지니어다. 화웨이가 상하이 외곽에 새로 설립한 글로벌연구센터에 이미 한국인 엔지니어가 수백 명 스카우트됐다는 말이 있다.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명예나 애국심만으로 SK하이닉스나 삼성전자의 최고 인력들이 빠져나가는 걸 막을 수 있겠는가.
한국 인재가 이공계를 진학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글로벌 인재들도 데려올 수 있다. 내년에는 SK하이닉스든 삼성전자든 파격적인 성과급을 지급하는 기업이 더욱 많이 나왔다는 뉴스를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대학입시에서 이공계 경쟁률이 치솟고 지역 거점 국립대도 이공계 입학 성적이 크게 올랐다는 뉴스가 보도되는 희망적인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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