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한가위, 따뜻한 우리말이 더 큰 선물이다 [전문가 칼럼]
최태호 중부대 한국어학과 명예교수
추석은 해마다 반복되는 단순한 명절이 아니다.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삶과 정성이 스며든 마음의 숨결이다.
'추석'(秋夕)이라는 말은 가을 저녁을 뜻하지만, 그 저녁은 평범한 저녁이 아니다. 삼국시대 신라의 가배(嘉俳), 곧 '가운데 날'에서 비롯된 이 명절은, 음력 8월 둥근 달이 세상을 환히 비추는 순간을 기다리며 사람과 사람, 하늘과 땅이 어깨를 맞대는 시간이다.
'한가위'라는 이름에서 '한'은 크고 '가위'는 가운데이니, 한가위는 '8월의 가장 크고 넉넉한 한가운데'라는 뜻이다.
우리에게 추석은 언제나 풍요를 상징한다. 논과 밭에서 거둔 햇곡식과 햇과일이 수북이 쌓이고, 가족이 함께 모여 부엌에서는 정성 어린 손길이 분주하다. 그러나 풍요는 음식과 곡식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한 상 가득한 음식보다 더 깊이 배를 채우고, 더 오랫동안 마음을 살찌운다.
그러나 추석 연휴든 일상이든, 세상을 살다 보면 대부분의 싸움이 언어에서 시작되는 것을 본다. 아주 사소한 일인데, 말을 함부로 해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그로 인해 언성이 높아지고 논점이 어긋나면서 감정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특히 우리나라는 존대법이 발달해 이로 인한 다툼이 잦다. "말이 짧다"로 시작해 욕으로 끝난다. 주먹질까지 가지 않으면 다행이다.
언어폭력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정치판을 돌아보면 더욱 심하다. 타의 모범이 돼야 할 사람들인데, 정계에만 들어가면 입이 험악해지고, 행동도 난폭해진다. 정책이나 법안을 만들어서 인기를 얻어야 하는데 거친 표현을 많이 하면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오호애재라!
'박살'(搏殺: 사람이나 짐승을 몽둥이 따위로 때려서 죽임)이라는 말이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의 전매특허처럼 쓰이기도 한다. 정말로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죽이라고 하면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말폭탄(?)을 쏟아내고 있다.
폭탄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물폭탄, 세금폭탄 등과 같이 아무 여과 없이 쓰이고 있다. 하지만 폭탄이라는 말은 병기의 일종으로 "폭발성의 물질을 장치해 던지거나 투하하거나 쏘도록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물폭탄이나 세금폭탄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어가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단어의 선택이 갈수록 전쟁 용어로 바뀌고 있다. 이미 전쟁을 겪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거친 표현을 너무 쉽게 내뱉는다.
아침이면 수많은 글이 휴대전화를 가득 채운다. 좋은 글도 많고 아름다운 사진도 많다. 밖에 나가 세상을 돌아보면 온통 십자가가 가득 차 있다. 초파일에 절에 가면 온통 선량한 사람들은 다 모여 있다. 그런데 세상은 어쩌자고 더욱 거칠어지기만 하는지 모르겠다. 좋은 글들을 그렇게 많이 읽으면서 가슴은 열리지 않는지 의문이다. 가슴은 따뜻하고 머리는 차갑게 하라고 했는데, 가슴과 머리가 온통 차갑게 변하고 있다. 이제 반성해야 할 때가 됐다. 우리말의 아름다운 점을 살려서 마음도 너그럽게 먹어야 한다.
언어는 마음의 거울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준다. 자신이 한 말을 되새겨 보자. 지나치게 외국어를 많이 섞어 쓰지는 않았는가, 남에게 상처를 주는 어휘를 사용하지는 않았는가. 말을 잘못하면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언어는 중요한 것이다. 이제는 외국어를 많이 알더라도 우리말을 사용해 보자.
우리말은 한자어가 많이 자리하고 있다. 이미 한자어의 세력에 밀려난 것도 사실이다. 어제, 오늘, 내일이라고 할 때 '내일'(來日)만 한자어다. 순우리말로는 '하제'라고 한다. 어제, 그제라고 할 때 '제'가 '날'을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이제부터는 내일이라는 말 대신 '하제'를 쓰면 어떨까. "하제 만나세"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데, '내일'이라는 단어가 익숙하다 보니 순우리말이 어색해진 것이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권장할 필요가 있다. 말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추석은 단순한 명절이 아니라 풍요와 감사의 시간이면서, 말 한마디로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다독이는 날이다. 이때 나누는 한마디가 관계를 따뜻하게 이어주는 큰 힘이 된다.
"올해도 건강하게 지내줘서 고맙습니다." 부모에게 드리는 이 짧은 말은, 한 해를 버텨낸 긴 시간의 무게를 위로로 바꾼다.
"네가 참 많이 애썼다." 청춘에게 건네는 이 말은, 세상이 아무리 차갑다 해도 아직 기대어 설 자리가 있음을 알려준다.
"멀리 와줘서 고맙다." 길을 달려온 친지에게 던지는 이 말은, 정든 얼굴 앞에서 흘린 땀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증명한다.
"달처럼 환한 복이 너에게도 가득하길." 둥근 달을 바라보며 속삭이는 이 말은, 어쩌면 가장 오래 남는 명절의 노래일지도 모른다.
추석의 본질은 풍성함이 아니라 '함께함'이다. 조상의 제사상에 올리는 술잔 한 잔도, 동구 밖까지 배웅하는 짧은 손 인사도 결국은 같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삶이 아무리 팍팍하더라도 한가위 달빛처럼 환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둥근 달이 하늘을 가득 채우듯 우리의 말도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를 바란다. 그 한마디의 온기가 한 해의 고단함을 덮고, 내년에도 다시 모일 수 있는 힘이 되리라.
opinion@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