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고교학점제, 기회인가 또 다른 혼란인가

김동춘 전 대전이문고 교장(교육데이터분석학회 부회장) = 고교학점제는 7차 교육과정(2002년)부터 적용된 선택형 교육과정의 연장선상인 2022 개정 고교 교육과정을 말한다. 이미 24년간 꾸준히 진행되어 온 정책이다.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맞는 과목을 선택해 학점을 채우고 졸업하는 방식은, 지식 습득보다 창의성과 문제 해결력이 중시되는 미래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이기에 정부의 변화에도 꾸준히 추진돼 왔다.

미국, 일본, 핀란드 등 교육 선진국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선택형 교육을 운영해 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24년간 진행돼 온 정책…국제적 흐름에도 부합

고교학점제의 순기능은 명확하다. 첫째, 진로 맞춤형 교육이 가능하다.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은 전공 기초 과목을,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은 직업 연계 과목을 더 많이 선택할 수 있어 개별적 진로 설계가 현실화한다.

둘째, 교육의 공정성이 제고된다. 대학의 특정 계열이나 수능 중심의 과목 편중을 완화하고, 다양한 수준의 학생에게 더 많은 학습 기회를 제공한다. 셋째, 국제적 흐름과도 부합한다. 이미 다수의 국가에서 학생 선택권 확대와 학점제를 시행하고 있는 만큼 한국 교육도 글로벌 흐름과 보조를 맞출 수 있다.

고교학점제 수업을 시행 중인 서울 한 고등학교에서 '스마트콘텐츠 실무' 수업을 하고 있다. /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실행 역량이 핵심…준비 부족으로 현장 혼란 키워

문제는 제도가 자체가 아니라 실행 역량과 준비 부족이다. 이재명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보여주는 모습은 집행 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제도의 순기능을 살리기는커녕 학점제 시행으로 불이익을 받는 자들이 새로운 제도가 도입돼 혼란이 야기됐다는 소리에 매몰돼 우왕좌왕하고 있다. 가뜩이나 준비 부족으로 인해 어려운 현장에 혼란만 부추기고 있다.

첫째, 교원과 교실 확충에 실패했다. 학점제에서는 소인 수 수업이 늘어나므로 더 많은 교사와 교실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실은 그대로이고 교원은 감축됐다. 지금 현장에는 교사와 교실이 턱없이 부족해 과목 선택권이 '형식적 자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영어, 수학 같은 주요 과목 외에는 선택지가 제한되고, 수능 관련 과목 이외에는 아예 열리지 않는 학교도 적지 않다. 결국 제도가 보장하는 자유가 현실에서는 제약으로 전락하고 있다.

둘째, 시설과 인프라가 따라가지 못한다. 과학, 정보통신, 예술 등 다양한 심화 과목을 운영하려면 실험실, 특수 교실, 첨단 장비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교육부의 투자 계획은 선언적 수준에 머물러 있고, 특히 농산어촌 지역 학교는 기본 시설조차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수도권과 지방 간 격차는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교육 형평성을 강화하겠다던 정책 목표와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는 셈이다.

셋째, 새 교육과정에 따른 교사 재교육이 부실하다. 고교학점제 하의 고교 평가는 논서술형에 기반한 절대평가인 성취도 평가의 전면 시행이었다. 하지만 2017년 고교학점제 도입 발표 후 논서술형 평가를 위한 교사 연수나 지원을 충분히 하지 않은 채 제도 시행 시점만 2022년으로 앞당겼다. 이러한 정부의 준비 부족으로 현장의 교사들은 불안과 혼란 속에서 제대로 된 수업 준비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는 제도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린다.

넷째, 현장과의 소통 부족과 졸속 추진이 문제다. 고교학점제에서는 국가가 정한 최소성취수준에 미달하면 학점 부족으로 졸업을 못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단위 학교에서 보충학습·재이수·개별지도 등을 통해 최소성취수준 달성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을 유급시키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을 교사에게만 책임을 떠넘기고 정치적 성과를 서두르며 현장을 무시했다. 그 결과 최소학력기준에 미달하는 학생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무산되고 출석만 하면 졸업하는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지금의 추진 방식은 '교육 개혁'이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를 혼란에 빠트리는 '정책 실험'에 불과하다.

교사·학부모 단체가 3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고교학점제 현장 중심 전면 재검토와 교사 정원 확충 및 학생 절대평가 체계도입을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
화려한 수사·속도전 대신 실질적 투자 선행돼야

결국 고교학점제의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무능한 정부의 준비 부족이다. 제도 자체는 옳은 방향이지만, 이를 뒷받침할 준비와 실행 능력이 없다면 학생과 교사, 학부모뿐만 아니라 국가의 미래까지 암울할 수밖에 없다. 고교학점제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제도이지 정치적 성과를 위한 장식물이 아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화려한 수사나 속도전이 아니다. 교원 충원, 교실 확충, 교사 평가 역량 강화, 시설에 대한 실질적 투자 그리고 현장과의 충분한 소통이 선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고교학점제는 또 하나의 실패한 교육정책으로 기록될 것이다. 제도의 옳은 취지를 살릴지, 아니면 무능한 정부의 졸속 실험으로 끝낼지는 오직 철저한 준비와 실행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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