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당사자끼리 '계약 없던 일로' 해도…압류된 채권은 채권자 몫"

대법관 11명 전원일치로 25년 만에 판례 변경
"합의해제로 생긴 위험, 합의한 당사자가 떠안아야"

조희대 대법원장이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기일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2026.9.29 ⓒ 뉴스1 이광호 기자

(서울=뉴스1) 이장호 기자 = 채권자가 압류한 채권이라면 채무자와 거래 상대방이 계약을 합의해제했더라도 원칙적으로 거래 상대방은 압류채권자에게 돈을 줘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이로써 합리적 이유 없이 채권 소멸만을 목적으로 한 합의해제라는 등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합의해제로 압류채권자에게 대항할 수 있다고 본 기존 판례는 25년 만에 바뀌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29일 김 모 씨가 A 사를 상대로 낸 추심금 청구소송에서 대법관 11명의 전원일치 의견으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울산지법으로 환송했다.

A 사는 2018년 7월 B 사가 시행하던 바이오가스 발전 사업을 8억5000만 원에 양수하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B 사에 받을 돈이 있던 김 씨는 2020년 6월 B 사가 A 사로부터 받을 양도대금 채권 중 3억5000만 원에 대해 가압류를 신청했고, 이 가압류를 본압류로 이전하는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까지 받았다.

그런데 A 사와 B 사는 2020년 8월 양수 계약을 합의해제했다. 김 씨는 2021년 6월 A 사를 상대로 추심금 지급 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A 사는 "계약이 합의해제됐기 때문에 양도대금 채권도 소멸됐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1·2심 모두 기존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A 사와 B 사가 아무런 합리적 이유 없이 채권 소멸만을 목적으로 양수계약을 합의해제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A 사가 김 씨에게 돈을 줘야 할 의무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2001년 6월 채무자와 제3채무자가 아무런 합리적 이유 없이 채권의 소멸만을 목적으로 계약을 합의해제한다는 등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3채무자는 채권에 대한 압류 또는 가압류가 있은 후에도 합의해제를 이유로 압류채권자 또는 가압류채권자에게 대항할 수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기존 대법원 판례가 타당하지 않다며 25년 만에 판례를 변경했다.

대법원은 "합의해제는 계약이 체결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상태로 복귀시킬 것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계약이지만, 그 효력은 당사자 사이에만 미치는 것이 원칙"이라며 "합의해제에 따른 계약 및 채권 소멸의 효력이 제3자인 압류채권자에게 당연히 미친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이어 "기존 대법원 법리는 채무자와 제3채무자의 사후적 합의로 인해 압류채권자와 배당요구채권자들이 압류의 처분금지효를 신뢰해 투입한 시간과 비용, 노력을 무위로 돌릴 수 있다"며 "압류 제도의 취지, 위험 창출 주체와 경위 등을 고려하면 압류 후 이루어진 합의해제로 촉발된 법적 위험은 원칙적으로 채무자가 부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제3채무자가 부당하게 불리해지는 것도 아니라고 봤다. 합의해제를 했는데도 압류채권자에게 대금을 지급하게 되더라도, 채무자에게 그 돈을 돌려달라고 청구할 수 있다고 했다.

만약 채무자가 돈을 제3채무자에게 반환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라면 그 위험은 이를 감수하고 기존 계약을 합의해제한 제3채무자 본인이 부담해야 하지, 합의해제와 상관없는 압류채권자에게 이를 전가해선 안 된다고도 했다.

다만 △법정해제·약정해제 등 계약관계를 소멸시킬 수 있는 별도 사유의 요건을 갖췄지만 합의해제의 형식을 취한 것에 불과한 경우 △피압류채권이 계속적 계약에서 발생하는 장래의 지분적 권리인 경우 △그 밖에 계약과 피압류채권의 내용과 성질, 피압류채권의 계약상 비중, 합의해제 또는 합의해지의 경위 등을 고려할 때 압류만을 이유로 합의해제의 대항력을 부정하는 것이 현저하게 부당하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등을 제3채무자가 입증한다면 압류채권자에게 대항할 수 있다고 봤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부분 채권압류 후 합의해제를 허용하는 획일적인 결론에 이르렀던 기존 법리를 폐기한 것"이라며 "채권압류 후 합의해제의 대항력에 관한 원칙과 예외를 전환함으로써, 압류재산의 현금화를 통한 채권 만족이라는 강제집행 제도의 목적 및 압류채권자의 이익을 압류재산에 대한 채무자의 처분의 자유보다 우선하여 보호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ho86@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