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삼성 근로자 다발성경화증 이어 뇌종양도 산재 인정(종합)

"현시점 의학규명 곤란 이유로 희귀질환 인과 부정할 수 없어"
"작업환경 복합적·누적적 작용…기준내 발암물질이어도 장애 초래"

수원다산인권센터와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회원 50명은 3일 오전 11시 수원 삼성전자 앞에서 '10년의 외침, 500일의 기다림 - 故황유미 10주기 추모' 기자회견을 열었다.2017.3.3/뉴스1 ⓒ News1 권혁민 기자

(서울=뉴스1) 최동순 기자 =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가 뇌종양에 걸려 숨진 고(故) 이윤정씨를 산업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에서 뇌종양으로 사망한 삼성 근로자를 산업재해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법원 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는 14일 고인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패소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서울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대법원은 "망인의 업무와 뇌종양 발병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정될 여지가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은 첨단산업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이른바 '희귀질환'에 해당한다"며 "그에 관한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발병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근로자의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특정 산업 종사자 군의 발병률이 평균 발병률보다 높고 유해요소의 종류와 노출 정도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인정된다면, 이는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단계에서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대법원은 "작업환경에 여러 유해물질이나 유해요소가 존재하는 경우 개별 유해인자들이 특정 질환의 발병이나 악화에 복합적·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비록 이 사건 사업장에서 측정된 발암물질의 측정수치가 노출기준 범위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근로자가 장기간 노출될 경우에는 건강상 장애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고등학생이던 1997년 5월 삼성전자에 입사한 뒤 2003년까지 온양사업장 반도체조립라인 검사(MBT) 공정에서 근무했다.

이씨는 만 30세인 2010년 5월 뇌종양의 일종인 교모세포종 진단을 받았고 2년 뒤 사망했다. 그는 2010년 7월 공단에 요양급여를 청구했으나 거절당했고 2011년 4월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이씨의 질병을 산재로 인정하고 요양불승인처분을 취소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근무하는 동안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등 유해 화학물질과 극저주파 자기장, 주야간 교대근무 등의 작업환경상의 유해 요소에 일정 기간 노출된 후 질병이 발생해, 발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2심은 이를 뒤집고 원고패소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업무상의 재해는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어야 하고, 인과관계는 이를 주장하는 측에서 증명해야 한다"며 "이씨가 입사 때부터 퇴사할 때까지는 특별한 이상 증상을 보이지 않았고 퇴직 후 약 7년 만에 교모세포종으로 진단받은 점, 교모세포종은 수 개월 만에 급격한 성장을 하는 특성을 가진 점 등에 비추어 보면, 뇌종양이 업무로 인해 발병하였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의 임자운 변호사가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삼성 반도체공장 근로자 故 이윤정씨 산재 인정 여부 상고심 선고를 마친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2017.11.14/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이같은 대법원의 판단은 산업재해 사건에서 피해자의 증명책임만을 강조했던 기존의 입장에서 선회한 것으로 평가된다. 질병 원인을 특정하기 힘든 희귀질환에 대한 공적 보험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 8월 삼성전자 LCD공장 노동자 이모씨의 소송에서 처음으로 다발성경화증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당시 재판부는 이 질병이 원인을 특정하기 힘든 희귀질환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는 작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상의 위험을 사업주나 근로자 어느 일방에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보험을 통해서 산업과 사회 전체가 이를 분담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의 임자운 변호사는 "재해자가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상황인지, 그 상황을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도 법원이 함께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 "그동안 요양급여 불승인을 남발한 공단의 태도도 변화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반올림에 따르면 현재까지 반도체·LCD 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 진단을 받고 제보한 사람은 총 29명이며,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보상을 신청한 11명 가운데 9명에게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불승인 처분을 받은 피해자 가운데 3명이 소송을 제기했으며 1명은 패소 확정, 1명은 1심 소송이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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