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의 전세난, 하나의 교훈[박선영의 경제 인사이트]

박선영 동국대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 교수
"임대차 안정의 시간표는 공급 속도가 좌우"

편집자주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거시·금융 경제학자다.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등 주요 경제·금융 정책기관의 위원회와 자문기구에서 제도 설계와 정책 평가에 참여해 왔다. '경제 인사이트'에서는 학술 연구와 정책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숫자 이면에 놓인 경제의 논리를 독자에게 차분하고 명료하게 전달할 예정이다. 특히 환율·금리·자산시장부터 금융규제, 디지털 금융과 통화 질서에 이르기까지 주요 경제 이슈를 데이터와 이론에 근거해 분석하고, 정책 결정이 시장과 가계에 어떠한 경로로 전달되는지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1990년 4월, 서울 천호동의 반지하 단칸방에서 일가족 네 명이 세상을 등졌다.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9만 원짜리 셋방에 살던 이 가족은 치솟는 전월세를 감당할 다른 방을 구하지 못했다. 그해 봄,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세입자 열일곱 명이 같은 이유로 목숨을 끊었고,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는 합동추도식이 열렸다.

선의의 제도 개정이 부른 비극

배경에는 선의의 제도 개정이 있었다. 1989년 12월 국회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을 고쳐 임대차 계약 기간의 최소 보장 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렸다. 반년 또는 1년마다 보증금 인상과 이사를 반복하던 세입자를 보호하려는 취지였다. 그러나 당시 시장은 제도 변화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조건 위에 놓여 있었다. 3저 호황에 따른 유동성 확대, 올림픽 전후의 자산시장 과열, 낮은 주택보급률, 신도시 입주를 기다리는 대기수요가 한꺼번에 겹쳤다.

계약기간 연장에 따라 일부 임대인이 향후 인상분을 계약 시점에 선반영하려는 유인이 커졌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1989년 29.6%, 1990년 23.7% 상승했다. 계약기간 연장이 상승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다만 수요와 공급의 여건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계약조건만 조정될 경우, 이행기의 비용이 협상력이 약한 임차 가구에 먼저 집중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서울 시내 다가구·다세대 주택 밀집 지역. (뉴스1DB) ⓒ 뉴스1 박지혜 기자

주목할 것은 당시 정책 대응의 방향과 속도다. 정부는 임대료를 직접 통제하기보다 임대주택 공급의 제도적 통로를 넓히는 방식을 택했다. 1990년 도입된 다가구용 단독주택 건축 기준이 대표적이다. 여러 가구가 함께 거주하되 법적으로는 단독주택으로 분류되고, 가구별 분양은 허용되지 않는 형태였다. 당시 기준은 연면적 660㎡ 이하, 3층 이하였으며, 기존 도심 필지에서 대규모 아파트 개발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임대공간을 늘릴 수 있는 경로를 열었다. 지하실과 옥탑을 개조한 무허가 셋방이 메우던 주거 수요의 일부를 제도권 공급으로 흡수한 것이다. 이후 전세시장 안정에는 이러한 소규모 공급 경로와 함께 1기 신도시 입주 등 주택공급 확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세 차례 더, 서로 다른 얼굴로 찾아온 전세난

이후 전세난은 세 차례 더, 서로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 1998년의 위기는 방향이 반대였다. 외환위기 이후 매매가격과 전셋값이 함께 하락하면서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집주인이 속출했고, 세입자들이 앞다퉈 경매를 신청하는 역전세난이 벌어졌다. 위기의 진원지는 부동산 바깥에 있었지만, 손실은 보증금이라는 사적 신용을 제공한 개별 가계에 고였다. 전세가 임차 가구를 주택 소유자에 대한 사실상의 채권자로 만든다는 점이 대규모로 드러난 시기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전세난은 또 다른 성격을 띠었다. 집값 정체와 하우스푸어의 등장 속에서 매매를 미룬 수요가 전세시장에 머물렀고, 전셋값은 장기간 상승세를 이어갔다. 당시 정책 대응은 공급보다 금융에 무게를 뒀다. 전세자금 대출과 공적 보증은 단계적으로 확대됐다. 목돈이 부족한 세입자의 당면한 주거 불안을 완화한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금융지원의 확대는 임차 가구의 지급 능력을 높이는 동시에 전셋값 상승을 뒷받침할 가능성도 지녔다. 높아진 전세가율은 매매시장에서는 갭투자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임차 가구의 주거 사다리를 지탱하려던 자금이 일부 지역에서는 주택 매입의 레버리지로 전환된 셈이다.

그 회로의 끝에서 네 번째 전세난이 나타났다. 2022년 이후 전세 사기와 보증 사고를 거치며 비아파트 전세에 대한 신뢰는 크게 약화했다. 2023년 봄 인천 미추홀구에서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전세의 안전성에 대한 불신은 비아파트 전세 수요의 이탈과 월세 전환을 촉진했다.

이는 단순히 계약 방식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다. 저소득 임차 가구에는 매달의 임대료가 저축 여력을 줄이고, 필요한 경우 신용대출 의존을 높이는 경로가 될 수 있다. 2024년도 주거실태조사에서 청년 가구의 임차 거주 비율은 82.6%에 이르렀다. 전세에서 월세로의 이행은 이들에게 자산 형성의 출발선이 늦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다시, 공급의 속도로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 등이 13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전월세 및 매매시장 안정을 위한 주택 신속공급 방안 및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한 금융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형일 재정경제부 1차관, 김 장관, 이억만 금융위원장, 임기근 국무조정실장. ⓒ 뉴스1 김명섭 기자

네 차례의 전세난을 관통하는 교훈은 결국 하나다. 임대차 안정의 시간표는 빠르게 공급될 수 있는 주택의 존재 여부에 크게 좌우된다. 1990년 다가구용 단독주택이 했던 역할처럼, 도심의 소규모 필지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에 공급할 수 있는 주택은 시장 이행기의 완충 재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그 완충 재고를 담당하던 비아파트 시장은 전세 사기의 후유증으로 수요와 공급이 함께 위축돼 있다.

이 점에서 지난 13일 발표된 주택 신속 공급 방안이 비아파트 공급 정상화를 전면에 둔 것은 방향이 옳다. 흥미로운 대목은 1990년에 그어졌던 다가구주택의 기준선, 즉 연면적 660㎡·3개 층 이하가 35년 만에 1000㎡·4개 층으로 넓혀졌다는 점이다. 일조 기준 완화, 신축 소형주택의 주택 수 제외 특례 연장도 같은 방향의 조치다.

남은 과제는 제도가 실제 착공으로 이어지는 속도다. 인허가 절차의 병목을 줄이고, 소규모 사업자의 자금조달 여건을 살피며, 임차인이 안심하고 계약할 수 있는 보증·신탁 장치를 함께 갖출 때, 이행기의 완충 재고는 다시 쌓이기 시작할 것이다.

1990년의 경험이 남긴 함의는 분명하다. 임대차 시장의 전환기마다 정책의 성패를 가른 것은 개입의 강도가 아니라 공급이 응답하는 속도였다. 월세 중심으로 재편되는 지금의 이행기에도 과제는 다르지 않다. 부담이 임차 가구가 감당하기 어려운 속도로 이전되지 않도록, 제도가 시장보다 반걸음 먼저 움직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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