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정당은 사회적 거름망이다

최경환 정치부 부국장
최경환 정치부 부국장

(서울=뉴스1) 최경환 정치부 부국장 = '히틀러' '나치'라는 말이 요즘 정치인들의 발언 속에 너무 쉽게, 자주 등장한다. 여야 가릴 것이 없다. 12·3 비상계엄 이후 극단화된 정치 세력들이 상대를 비난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비유가 됐다.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파시즘이 다시 현실 정치에서 세력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라는 악마적 캐릭터와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광기의 기억은 전 인류에게 두 번 다시 파시즘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치 현실에서 파시즘이 다시 공격 무기로 '각광' 받는 이유는 뭘까.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달 1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3개 특검의 무도한 칼춤과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를 보면서 히틀러의 망령이 어른거린다"고 했다. 같은 당 송언석 원내대표도 지난 9월 13일 "이 대통령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사람은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이라고 비난했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22일 페이스북에 "내란수괴 피고인을 배출한 국민의힘이 사법부 독립을 말할 자격이 있나. 노상원 수첩을 보면 나치보다 더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려 했던 자들이 누구였는지 명백하다"고 했다. 당 대표급의 최근 발언만 찾아봐도 이 정도고, 숱한 정치인들이 수없이 많은 관련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이들이 상대방을 히틀러라고 비난할 때 꼭 붙이는 설명도 비슷하다. 히틀러가 쿠데타로 집권한 적이 없으며 합법적인 절차를 밟았다는 경고다. 선거에 당선됐다고 해서 절대적 정당성을 얻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당은 과거 윤석열 전 대통령을 사례로 들어 민심에 경고하고, 야당은 이재명 대통령을 지목해 폭주를 경계한다.

정치인들이 이렇게 서로 힐난할 때 직접 투표한 국민들은 난감하다. 선출했으나 신뢰는 하지 말 것이며 뽑은 사람이 잘못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파시즘이 발호한 역사를 보면 정치인들의 이런 주장이 얼마나 염치없는 행태인지 알 수 있다. 파시즘의 악몽은 국민들이 선거를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히틀러를 키운 것은 독일 기득권 보수주의 정치인들이었다. 1928년 나치당은 지지율이 2.8%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후 독일의 경제 위기와 농산물 가격 폭락, 도시실업 증가로 1930년 9월 선거에서 20.8%를 얻어 제2당이 됐고, 1932년엔 37.2%로 제1당이 됐다.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중도 우파 정치연합이 주도했으나 1930년 3월 대공황 이후 취약해진 정치력을 회복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히틀러와 손잡았다. 나치와 합동연설회를 열어 이들이 정상적인 정치세력으로 보이게 하는 데 일조했다.

파시즘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로버트 O. 팩스턴은 파시즘을 이렇게 정의한다. "대중적 지지를 등에 업고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 엘리트층과 협력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법적 제약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정치 행동의 한 형태다."

팩스턴은 특히 파시즘 정당이 전통 엘리트층과 협력관계를 맺는 부분을 강조한다. 결국 정통 정당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정치는 극단주의로 치달을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경고다.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에서 공저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극단주의자나 선동가가 대중의 인기를 얻었을 때 기성 정치인들은 힘을 합쳐 그들을 고립시키고 무력화한다. 정당이 사회적 거름망으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며 "정당은 곧 민주주의의 문지기(Gatekeeper)"라고 말한다.

두 정치학자가 제시한 '독재자 감별법'을 보면 현재 우리 정치현실이 위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리트머스 시험지'로 이름 붙인 4가지는 △민주주의 규범 거부 △경쟁자의 존재 부인 △폭력 조장이나 묵인 △언론 및 정치 경쟁자의 기본권 억압 성향 등이다.

저자는 이들 모두를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이 중 하나라도 충족한다면 독재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12·3 계엄 이후 한국 정치 현실에서 쉽게 목격했던 장면들이 4가지 리트머스 시험지에 뚜렷한 반응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계엄 이후 극단 세력과 기존 정당이 장외 집회를 같이하거나 여야 정당의 대표가 상대 당의 리더를 적으로 규정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계엄 1년을 맞는 정치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파시즘의 악몽을 소환하며 국민들을 겁박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회적 거름망'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때다.

NKHCHOI@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