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확장]74년 전 '4월24일'을 기억하며
(서울=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 봄꽃이 만발한 4월은, 그러나 잔인하다. 제주 4·3항쟁의 기억이, '4·16세월호' 아이들을 잃은 기억이 그렇다. 그래도 우리는 4·19혁명을 기억하기에 4월을 견딜 수 있는지도 모른다.
재일조선인에게도 4월24일은 특별한 날이다. 줄곧 '한신(阪神) 교육투쟁'이라 불렸지만, 근래엔 오사카(大阪)·고베(神戶)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 전체에 걸친 투쟁이었음을 들어 한신(阪神)을 빼고 '4·24교육투쟁'으로 부른다. 1948년 1~5월 재일조선학교를 둘러싸고 미국 점령군, 일본 정부, 그리고 재일조선인이 벌였던 대립과 투쟁의 역사다. 오늘은 비록 장님 코끼리 만지기 정도의 분량이나마 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한 재일조선인이 그 무엇보다도 빠르고 광범위하게 진행했던 민족교육사업,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기에 일본 전국에 600여개의 조선학교가 만들어졌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해 10월에 설립된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은 핍박과 가난에도 아이들에게 해방 조국의 말과 글을 가르치고자 만든 학교, 우리 학교를 체계화해 나갔다. 지식인들을 동원해 교사가 되게 하고, 교과서를 만들고, 패전으로 텅 빈 군수·화물창고, 비어있는 일본학교 부지를 빌려 교실로 삼았다. 책걸상·칠판도 변변히 없었지만 자주적 민족교육을 착실히 꾸려갔다.
'사건'은 3년 후인 1948년 1월24일 일본 문부성 학교교육국장 명의로 도도부현(都道府縣·광역지방자치단체) 지사에게 내려진 1장의 통달에서 시작됐다. '조선인 학교 취급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1·24통달'이다.
1.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법령에 따라야 한다.
2. 학령 아동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시정촌(市町村)립·사립소학교 및 중학교에 취학시켜야 한다.
3. 사립소학교·중학교는 학교교육법에 의해 도도부현 감독청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4. 학령 아동·학생 교육에 대해 각종학교 설치는 인정하지 않는다.
5. 사립 소학교·중학교엔 '교육기본법' 제8조가 적용되고, 교과서·교과 내용에 대해선 '학교교육법'이 적용된다.
6. 조선어 등 교육을 과외로 행하는 것은 괜찮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체적으로 비용을 들여 교육을 한다 해도 '허가'가 없는 한 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재일동포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조선사람이 조선말과 글을 배우지 못하고 일본학교로 다시 들어가는 건 '해방'이 아니라 '식민'의 반복일 뿐이었다.
그해 '3·1운동' 제29주년 기념대회가 일본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동포들은 '민주주의적 민족교육의 자주성 확보'란 슬로건을 내걸고 일본 정부와 연합군총사령부(GHQ)의 탄압에 맞서기로 결정했다.
1948년 3월23일, 조련은 25인으로 구성된 '조선인 교육 대책위원회'를 조직해 문부성과 GHQ 책임자들을 찾아 협상을 요구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확고한 '불가' 방침이었다. 효고현 고베시장은 조선인들의 '조선학교 폐쇄 철회' 요구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들에겐 시민권이 없다. 일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신들의 훌륭한 나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3월31일이 '조선학교 폐쇄' 기한이었던 야마구치(山口)현에서 열린 '조선인 교육 부당간섭반대 인민대회'에 3만여명의 동포들이 운집했다. 동포들은 야마구치현청을 둘러싸고 24시간 농성을 전개했고, 일시적이나마 폐쇄령을 취소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오카야마(岡山)현에선 3월17~18일 양일에 걸쳐 '조선학교 폐쇄'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항의하던 조련 간부가 체포되자, 재일동포뿐 아니라 일본 노동조합 등 시민단체가 합세해 지사와 협상을 벌여 학교 폐쇄 명령의 집행을 중지시키는 쾌거를 얻어냈다.
'4월19일까지 인가를 얻지 못한 학교는 폐쇄한다'는 통첩을 도쿄도 지사에게서 받은 도쿄지역 동포들은 '조선인 교육 불법 탄압 반대 학부형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 참가한 김순이 동포는 이렇게 말한다.
"난 진정한 조선인이며 조선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난 조선말을 못 합니다. 이는 저 일본제국주의의 혹독한 교육정책 탓입니다. 조선인이면서 조선어를 못 하는 슬픔과 이 고통을 왜 또다시 우리 동생들에게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그날 조선인 교육 대책위원회는 도쿄도 지사에게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1. 다음의 4개 항목을 정식 문장으로 확인할 경우엔 사립학교 인가를 받을 용의가 있다.
1)조선인 학교의 교육 용어는 조선어로 할 것.
2)교과서는 조선인 초등 교재 편찬위원회에서 재일조선인 아동에 적합하게 편찬한 교과서(GHQ 검열필)를 사용할 것.
3)학교 경영관리는 학교 단위로 조직된 학교관리조합에서 행할 것.
4)일본어를 정과로 채용할 것.
2. 위와 같은 기정사실에 대한 확인이 없으면 조선인을 노예시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요구에 응할 수 없다.
3.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의 책임은 일체 도쿄도 지사가 져야 한다.
그러나 다음날인 4월20일 도쿄도는 결국 '조선학교 폐쇄'를 명령했다.
각지의 저항은 효고(兵庫)현과 오사카부에 이르자 절정에 달한다. 효고현 고베시는 1948년 2월28일 통지를 내려 '3월 말까지 학교를 비우라'고 명령했다. 효고현 조련본부를 중심으로 동포들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4월7일에 이르자 효고현 군 정부(GHQ)는 '10일까지 교사를 비우라'고 명령하고 현지사 지령으로 11일 이후 조선학교 사용을 금지했다. 동포들은 70여명의 조선인 대표를 꾸려 지사와의 교섭을 요구했다. 4월15일에 있었던 교섭에서 효고현지사는 "대표가 너무 많다. 줄여 달라"며 협상을 질질 끌었다.
협상 결과가 궁금해진 동포들은 현청으로 달려갔으나, 경관 300여명에 의해 73명이 검거됐다. 이에 재일동포들은 다시 △검거된 동포들의 석방 △불법 탄압 철회 △학교 문제 교섭을 요구하며 경찰서·현청·검찰청을 둘러싸고 농성을 계속했다.
4월23일이 되자 고베시 당국과 경찰은 3개 조선학교를 상대로 경찰 200여명을 동원해 농성을 벌이던 보호자·아동들을 폭력적으로 학교 밖으로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고, 경찰은 '부상을 당한 조선인이 오더라도 진단서를 끊어주지 말라'는 통고를 시내 병원에 내렸다고 한다. 조선인의 분노는 폭발 직전이었다.
각지의 저항은 효고(兵庫)현과 오사카부에 이르자 절정에 달한다. 효고현 고베시는 1948년 2월28일 통지를 내려 '3월 말까지 학교를 비우라'고 명령했다. 효고현 조련본부를 중심으로 동포들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4월7일에 이르자 효고현 군 정부(GHQ)는 '10일까지 교사를 비우라'고 명령하고 현지사 지령으로 11일 이후 조선학교 사용을 금지했다. 동포들은 70여명의 조선인 대표를 꾸려 지사와의 교섭을 요구했다. 4월15일에 있었던 교섭에서 효고현지사는 "대표가 너무 많다. 줄여 달라"며 협상을 질질 끌었다.
협상 결과가 궁금해진 동포들은 현청으로 달려갔으나, 경관 300여명에 의해 73명이 검거됐다. 이에 재일동포들은 다시 △검거된 동포들의 석방 △불법 탄압 철회 △학교 문제 교섭을 요구하며 경찰서·현청·검찰청을 둘러싸고 농성을 계속했다.
4월23일이 되자 고베시 당국과 경찰은 3개 조선학교를 상대로 경찰 200여명을 동원해 농성을 벌이던 보호자·아동들을 폭력적으로 학교 밖으로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고, 경찰은 '부상을 당한 조선인이 오더라도 진단서를 끊어주지 말라'는 통고를 시내 병원에 내렸다고 한다. 조선인의 분노는 폭발 직전이었다.
오사카에서도 재일동포들의 저항은 거셌다. 4월23일 동포 1만5000여명이 모여 오사카부청을 에워싸고 '조선학교 폐쇄령' 철회를 요구했다. 오사카 당국은 경관을 동원해 강제 진압으로 맞섰다. 70여명이 부상하고 179명이 검거됐다. 24일에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26일엔 성난 재일조선인 4만여명이 부청에서 싸웠다. 미 점령군 제1군단 소장 스윙의 지령에 따라 일본 경찰국장 스즈키는 경찰대 5000여명과 소방차를 동원해 진압했고 저항하던 동포들을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렸다. 16세 김태일군이 총에 맞아 숨졌다.
훗날 스즈키는 자서전에서 조선인의 투쟁을 '소요사건'이라 칭하고 폭도화한 조선인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분발했다고 자랑스럽게 썼다. 그가 쓴 '치안 문제의 암(癌), 조련'이란 글엔 조선사람에 대한 끝없는 멸시감이 배어 있었다고 한다.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중략) 학교는 소학교 4학년 때 그만두고 그날부터 7명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공장으로 일을 하러 가거나 담배 장사를 나가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죽을힘을 다해 일했다."
"(전략) 죽은 날 아침, 오늘 인민대회에 나가냐고 물으니 '안 간다'고 어머니를 안심시키고는 친구들과 함께 '나쁜 일본인이 우리 학교를 없애려고 하니까 오늘은 인민대회에서 누가 죽는지 싸워보자'고 말하며 나갔다고 한다."
김태일군 모친의 증언이다.
도쿄에선 1948년 4월27일 오전 5시30분을 기해 경찰이 조선학교 책임자 가택을 수색하고 학교를 봉쇄, 교장 15명을 구속하는 강경책을 취했다. 이에 학부형회는 임시휴교를 결정한다. 5월3일 또다시 도쿄도 교육국이 학교 폐쇄를 명했고, 그날 밤 중 조선인 교육 대책위원회와 문부대신은 '각서'를 교환한다. 교장들은 다음날 모두 석방됐다. '각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현재의 학교는 폐쇄하고 새로운 학교 교육령에 따라 인가 신청을 시행한다.
2)교과과정은 학습지도요령에 의한다.
3)문부성이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특수 수업을 시행한다.
이 같은 각서 내용을 조건으로 동포들은 조선학교에 대한 사립학교 인가 신청을 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교육기본법' '학교교육법'의 틀 안에서 '선택 교과' '자유 연구' '과외'로서 조선어, 조선사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1948년 1~5월의 '민족교육 사수 투쟁'은 일단락됐다.
'4·24교육투쟁' 기간 재일조선인 시위 참가자는 총 100만3000여명, 체포 3076명, 부상자 약 150명, 사망자 2명(김태일군·박주범 조련 효고현 본부 위원장), 기소된 조선인 212명, 군사재판 회부 38명, 일본재판 회부 약 169명이었다. 체포된 재일조선인 중 6명은 본국(남한)으로 송환됐다.
이 투쟁 과정에서 조선학교 40%가 폐쇄됐으나 나머지는 명맥을 유지했다. '각서'로 인해 형식적으론 불리한 상황에 놓였지만 당시 학교를 다닌 동포들 증언에 따르면 그 전과 다름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4개월이 지난 1949년 9~10월, GHQ와 일본 정부는 조련을 강제 해산시켰다. 동시에 남아 있던 조선학교 300여개도 강제 폐쇄됐다. 1955년 재일조선인총연합(총련)이 발족하기까지 6년간 조선학교는 일본의 단속 아래 도립·시립·자주 학교 등으로 암흑의 시기를 겪는다.
1948년 4월 일본의 '조선학교 폐쇄령'과 그전에 본국(남한)에서 일어났던 '제주 4·3사건'은 결코 다른 류의 사건이 아니다. 조선의 남단과 일본에 동시에 진주해 있던 미군은 위로부터 거세지던 공산주의 혁명의 물결을 두려워했다. 서둘러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원했고 1948년 5월10일로 예정되어 있던 단독선거를 무사히 치러야 했다. 저항이 거셌다. 통일 독립국을 원하던 사람들은 목숨을 걸었다. '4·3'과 '4·24'도 그 과정에서 발생했다.
'4·24교육투쟁'의 한복판에서 잠시나마 승리를 누렸던 효고현 동포들은 비상사태선언으로 조선인 사냥을 당한다. 조선인 1900여명이 감옥에 갇혔다. 아직 민단도 만들어지지 않았던 효고현엔 '건국청년동맹'(건청)이란 이름의 친일계 우익 조선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GHQ, 일본 정부와 친밀한 관계였다. 물론 남한 우익인사들과도 친밀했다. 조선인 사냥을 나섰던 헌병들 앞잡이 노릇을 하며 조선인 집을 수색하고 검거에 협조했다. 그들은 수감된 조선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때, 이제부터 조련이 하는 말은 듣지 말고 건청과 경찰이 하는 말을 듣든지, 남선 단정(남한 단독정부)을 지지하든지. 그러면 석방시켜 주겠다."
이에 응하면 석방이었고 불응하면 구속이었다. GHQ가 어째서 '조선학교 폐쇄'를 기도했는지 명백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4·24 민족교육 사수 투쟁'은 74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일본은 지금도 조선학교 폐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분단은 여전히 재일조선인의 삶을 붙잡고 있다.
yellowapollo@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편집자주 ...[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 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