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담화는 왜 밤에 나올까…北도 모든 신경 美에 집중한다
이틀 연속 워싱턴 시간에 맞춰 담화…지금은 '美에 메시지 집중'
트럼프와 친분 강조하면서 韓엔 막말…'韓 없는 직거래 원한다' 시그널
- 김예슬 기자
(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 북한의 대외 총괄인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이 이틀 연속으로 늦은 밤에 북한 당국의 입장을 밝히는 담화를 발표했다. 한국과 13시간의 시차가 나는 워싱턴 D.C.의 업무 시간에 맞춰 메시지를 발신하면서 현재 북한이 미국에 자신들의 입장을 우선 관철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분석이 21일 제기된다.
김 부장은 특히 이재명 대통령을 직함 및 존칭 없이 '리재명'으로 부르면서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는 '훌륭한 관계'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북한이 한국의 관여 없이 미국과 '1 대 1'로 먼저 이야기를 하겠다는 전략이 내포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김 부장은 지난 19일 밤 10시쯤 '주요 국제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발표한 데 이어 20일엔 밤 9시쯤 이틀 연속 담화를 냈다. 19일 담화는 워싱턴 D.C. 기준 오전 9시, 20일 담화는 오전 8시에 나온 것으로 미국이 본격적인 업무를 개시하는 시각에 맞춰 두 번의 담화가 나온 것이다.
북한이 주요 대미 메시지를 워싱턴 D.C.의 업무 개시 시간에 맞춰 내놓는 것은 과거에도 즐겨쓰던 방식이기 때문에 이번 담화의 발표 시간 자체도 하나의 메시지라는 해석이 유효해 보인다.
북미 비핵화 협상이 교착 상태이던 지난 2019년 12월 5일 밤 10시에 최선희 당시 외무성 제1부상이 트럼프 대통령을 '늙다리'라고 비난하는 담화를 낸 것이나, 지난 2021년 6월 리선권 당시 외무상이 "미국과 어떤 접촉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밤 9시에 낸 것이 그 사례다.
김 부장은 19일 밤 담화에선 한미 연합연습 축소 등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유화 메시지와 관련해 북미 간 접촉이 있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은 부인하면서도 "우리 국가수반(김정은)이 트럼프에 대해 개인적으로 좋은 추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러 차례 밝힌 일이며 두 지도자의 관계는 훌륭하다"면서 미국과의 외교가 가능하다는 여지를 남겼다.
반면 20일 밤 담화에선 이재명 대통령을 가리켜 "앞에서는 트럼프의 '연습 축소 결단'에 '경의'를 표한다느니, '고심이 담긴 큰 결정'이라느니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로 아첨하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한 '자주국방'과 '독자적인 군사력 확보'를 운운한 리재명이 안팎이 다른 이중적 언행을 보였다"라며 조롱 섞인 비난을 가했다. 북한이 한국 대통령의 이름을 직함 없이 거론하며 비난하는 것은 남북 관계가 최악일 때 쓰던 방식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시간 밤 9시는 한국 정부의 당일 대응이 끝난 시점인 동시에 워싱턴 D.C.의 뉴스 사이클이 열리는 오전 시간"이라며 "이틀 연속 심야 메시지를 낸 것은 북한이 이번 국면을 매우 능동적인 템포로 운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라고 분석했다.
확연하게 톤이 다른 두 담화를 종합해 분석하면 현재 북한이 원하는 상황 전개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미국과의 외교는 '조건부'로 가능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의 개입은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아직 미국의 제안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보유와 대북제재 등 '적대 정책 철회'라는 조건을 수용할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대화 여지는 열어둔다는 것이 북한의 계산으로 보인다.
다만 8년 전 비핵화 협상 때도 각종 대북제재와 한미 밀착으로 인해 남북 양자 간 협상과 교류가 수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북한은 당장은 한국과는 '메리트'가 있는 협상을 할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한국과의 협의 없이 북한과의 대화를 강하게 추동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한미동맹 구도는 단단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이 미국의 업무 개시 시간에 맞춰 한국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것은 미국에게 "한국과 함께 나설 생각을 하지 말라"라는 메시지를 부각하려는 의도도 담긴 것으로 분석된다. 한미가 합의한 '피스메이커(미국)+페이스메이커(한국)' 구도는 수용하기 어렵다는 의사표시라는 것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9일 김 부장의 담화 직후 북한의 핵무기 수를 '57개'라고 언급하면서 "비핵화에 대해서는 지금 언급하고 싶지 않다"라고 발언한 것이 북한의 입장에선 운신의 폭을 넓혔을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보유를 전제로 협상에 나서겠다는 의중을 드러냈다는 해석이 제기되면서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의 전략적 대화 상대는 오직 미국이며 한국 정부가 중간에서 중개자나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조력자) 역할을 자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 북한의 기조로 보인다"라며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은 자제하면서 이 대통령만 집중 공격한 것은 대외 전략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보여주는 흔적"이라고 짚었다.
북한이 19일 김 부장의 담화에 이어 20일 오후 사거리 300㎞의 '대남용' 단거리탄도미사일(SRBM) 10여 발을 무더기로 발사한 것도 한미에 대한 온도가 다르다는 메시지로 풀이된다. 북한은 과거엔 미국의 전략자산과 병력이 상당수 투입되는 한미 연합연습 기간에 핵항공모함이나 핵추진잠수함 등 미국의 자산을 노린 무기체계를 동원한 도발을 감행해 왔는데, 이번엔 그런 도발이 없었다.
미 태평양사령부도 북한의 도발에 대한 성명에서 "미국 인원이나 영토, 또는 우리 동맹국들에 즉각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라고 평가하면서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최근 북한의 행보는 △미국과의 협상이 우선순위이며 △다만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판을 다시 짜겠다는 의도가 종합된 데 따른 것이라는 분석으로 귀결된다. 한국은 협상 구도에서 밀어내고,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고 북한에 불리한 정책을 철회하도록 해 자신들의 전략적 지위를 높이겠다는 구상으로 관측된다.
이는 역설적으로는 미국이 북미 대화 재개에 적극적인 만큼 북한 역시 미국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동시에 2018년과 달리 러시아와 중국이 언제든 북한을 외교적으로 지원하는 강한 동맹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도 더 자신감을 갖고 미국과의 협상에 나설 수 있다는 판단이 배경에 깔린 것으로도 해석된다.
yeseul@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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