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향가'와 내고향여자축구단[정창현의 북한읽기]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
북측의 '내고향여자축구단'이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참가를 위해 남측에 온다. 북측 스포츠팀의 방한은 8년 만이다. 내고향여자축구단은 오는 17일 입국해 20일 오후 7시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수원FC위민과 4강전을 치르며, 승리하면 23일 오후 2시에 열리는 결승전에 임한 뒤 24일 출국할 예정이다. 특히 내고향여자축구단의 방남은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선언하며 남북 간 경색 국면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성사돼 더욱 관심을 끈다.
2012년 평양을 연고로 창단된 내고향여자축구단은 2021~2022 시즌 북한 여자축구 1부리그에 우승하면서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선수단의 상당수가 국제축구연맹(FIFA) 17세·20세 이하 연령별 월드컵에서 우승 경험을 갖춘 국가대표급 선수로 구성됐다고 한다. 감독을 맡고 있는 리유일은 1966년 북한이 제8회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했을 당시 골키퍼였던 리찬명의 아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축구단이 북한 '재벌기업'의 하나인 내고향무역회사의 후원을 받는 '기업형 체육단'이란 것이다. '내고향'이란 축구단 이름도 모기업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 설립됐는지 확인되지 않는 '내고향무역회사'는 초기에 담배사업을 통해 성장한 기업으로 보인다. 산하에 내고향담배공장을 두고 '7.27', '아침' 등의 담배를 생산하고 있다. '7.27'은 한때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피웠던 담배로 알려져 있고, '아침'은 해외로 수출된다. 그 후 소주 등의 주류와 빵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고, 김정은 체제 출범 후 '내고향'이란 상표로 운동복을 비롯해 운동화와 축구공, 탁구판 등 각종 스포츠 용품과 장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체육용품을 수입에 의존하던 북한은 2012년 국무위원회 산하에 국가체육지도위원회를 신설하고 중국으로부터 기자재를 도입해 평양체육기자재공장 등을 신설해 체육용품 국산화에 나섰는데, 이 무렵 '내고향합작회사'도 설립됐다. 이때부터 북한 내에서 '내고향'이라는 상표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평양시 문수거리에 3층 규모의 '문수내고향체육용품상점'도 문을 열었다.
북한은 국가체육위원회 신설 후 주요 기관이나 기업에서 종목별 경기단체나 개별 선수단을 후원하는 체계를 도입했는데, 이때 내고향무역회사도 내고향여자축구단을 창단, 후원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스포츠와 상업자본의 결합 현상'은 김정은 체제 들어 뚜렷한 변화 중의 하나다.
4년 후인 2016년 북한의 대외 선전 매체 <조선의 오늘>은 '내고향'을 '질에 있어서 세계의 이름난 상표의 체육용품들에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고 선전하며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인 '아디다스', '퓨마'와 견주기도 했다. 재일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내고향합작회사에서 갖가지 체육용품들을 생산해 온 나라에 체육열풍을 일으키는데 적극 이바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2017년에 열린 제20차 평양봄철국제상품전람회에 설치된 '내고향합작회사'(NAEGOHYANG.J.V.CO) 전시관에는 체육용품 외에도 소주와 담배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2018년 평양동계올림픽 때 내고향무역회사는 북측 선수단의 후원사로 국내 언론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당시 북측 응원단은 모두 '내고향'이란 로고가 선명한 가방을 들고 있었다.
내고향무역회사는 2024년에 김치, 빵, 주류(맥주 제외), 담배 등 총 4개 부문에 '내고향' 상표로 러시아에 상표 등록을 했다. 이를 두고 러시아 매체들은 북러관계 진전에 따라 북한산 소주의 수입 가능성을 점쳤다.
남쪽에도 친숙하게 들리는 '내고향'이란 용어는 북쪽 사람 사이에서는 아주 익숙한 이름이다. 1949년 개봉한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 제목도 '내고향'이었다. '내고향'의 감독은 강홍식으로 영화배우 최민수의 외조부이며, 이 영화에는 월북한 문예봉, 류경애, 태을민 등 당대의 유명 영화배우들이 출연했다. 영화 '내고향'의 원래 제목은 '고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본을 본 김일성 당시 수상이 '내고향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제목이 바뀌었다고 한다.
'내고향'은 북한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노래 '사향가(思鄕歌)'의 첫 구절이기도 하다. '사향가'의 1절은 '내고향을 떠나올 때/나의 어머니 문 앞에서 눈물 흘리며 잘 다녀오라 하시던 말씀/아, 귀에 쟁쟁해'로 되어 있다.
'사향가'는 원래 송도고등보통학교 음악교사 정사인의 작품으로 1925년 성악가 안기영이 부른 '내고향을 이별하고'가 원곡이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당시 인기를 끌었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널리 불린 곡이기도 하며, 슬픈 이별의 노래라서 그런지 당대에는 죽은 사람을 위한 장송곡으로 많이 연주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 불릴 때는 2절 가사 '내고향을 떠나올 제 우리 어머니/문 앞에서 내 손 붙잡고 잘 다녀오라 하시던 말씀/아 아 귀에 생생타'가 일부 수정돼 1절로 바꾸고, 2절에 새로운 가사를 붙인 노래로 불렸다. 제목도 이때 '사향가'로 바뀌었다. 떠나온 고향의 대한 향수와 부모님의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사향가'는 현재도 북한에서 독창뿐 아니라 관현악곡 등으로 창작돼 널리 불리고 연주되고 있다. 특히 북한 사람들에게 '사향가'는 김일성 주석이 창작하고 부인 김정숙이 자주 부른 노래이자, 김 주석이 80세 생일날 직접 부른 노래로 각인돼 있다. 실제로 2000년대 평양을 방북했을 때 조선중앙TV에서 김 주석이 '사향가'를 부르는 장면을 재방송하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여러 번 목격한 바 있다.
북한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향가'의 첫 구절 '내고향'을 회사 이름과 상표로 사용하고 있는 내고향무역회사는 힘 있는 기관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설치 이후 급성장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북한은 '내고향'이란 상표에 '정다운 이름과 향기가 깃들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내고향축구단의 방남이 남북관계에 정답고 따뜻한 바람이 될지는 불투명하다.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 선언 이후 남북관계를 '한국과 조선'이라는 두 국가로 고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고민 끝에 여자축구단을 한국에 파견한 배경을 두고 대회 불참 시 벌금과 제재로 국제대회 참가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에 국익 차원의 현실적 선택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내외적으로 여자 축구가 국가의 위상을 상당히 강화할 수 있기 때문에 참가를 결정했다는 분석도 있다. 북한이 이번 대회를 '축구에서만큼은 적대국인 한국보다 우월하다는 강한 메시지를 주민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회'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배경이 무엇이든 두 가지 점은 분명하다. 첫째, 여자축구단의 방남은 2020년 이후 코로나19 사태로 지속돼 온 북한 내부의 비상방역체계가 완전히 해제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비상방역위원회의 반대로 각종 행사와 관광객 유치에 제동이 걸렸지만, 이제는 대외교류와 해외 관광객 유치를 본격화하겠다는 신호로 보인다.
둘째, '적대적 두 국가' 관계에서도 국제적 틀에서 비정치적인 분야의 교류를 한국과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과의 대화나 교류는 아직 고려하지 않고 있지만 다자가 만나는 형태의 국제적 행사에는 참가할 수 있다는 여지를 두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이번 남북 간 여자축구 경기를 남북 교류보다는 국제대회에서의 '한국과 조선의 경기'로 판단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김일국 체육상 등 남북 당국 간 대화에 임할 수 있는 고위급 인사들의 방남 가능성도 거의 없다.
정부는 '이번 대회는 순수 민간 스포츠 경기'라는 점을 강조하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국가대항전보다 상대적으로 정치적 부담이 적은 민간 클럽팀 경기를 조용하고 차질 없이 치르고, 이런 사례들을 늘려 '평화 공존 분위기' 조성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는 분위기다.
과거 같았으면 한반도기를 흔들며 남과 북을 동시에 응원하고, 북측 선수단도 이에 호응하는 모습이 연출될 것이다. 그러나 오는 20일 수원에서 열리는 경기에서 이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오히려 여러 가지 걱정 섞인 목소리만 나온다. 행사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국가, 국기, 호칭 문제 등이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축구단의 방남이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푸는 계기로 선전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자칫 북한이 입장을 변경해 불참선언을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북한이 언론 노출과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냉랭하게 대응해 '적대적 두 국가'란 남북관계의 현주소를 부각하는 데 집중할 수도 있다.
이러한 우려가 쓸데없는 걱정에 그치도록 정부와 대한축구협회가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남과 북이 공감할 수 있는 이름 '내고향'처럼 정치적 논란 없이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남북 축구경기가 치러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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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북한 정치·군사·사회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함께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등 북한 수뇌부에 대한 '리더십 해석'을 통해 반 발짝 앞서 북한의 변화를 읽어낸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은 서울대 대학원(국사학과)을 마치고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전문기자를 거쳐 국민대·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국가기록원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