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엔 신중, 한국엔 '무조건적 분노'…노선 전환 없는 北의 평행선 외교

김정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남북 '적대적 두 국가' 노선 재확인
韓에는 말폭탄, 美 향해서는 제한적 언사 구사

(평양 노동신문=뉴스1) =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4일 "최고인민회의 제15기 제1차 회의 2일 회의가 23일에 진행됐다"라며 김정은 당 총비서가 국정 운영 구상을 담은 시정연설을 했다고 보도했다.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DB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Redistribution Prohibited] rodongphoto@news1.kr

(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한국에는 "무자비한 대가"를 거론하는 초강경 메시지를 쏟아낸 반면, 미국에 대한 비난 수위는 관리하는 뚜렷한 온도 차를 드러냈다. 지난 정부 때부터 이어 온 대남 '평행선 외교'를 통해 한국에게 전혀 여지를 주지 않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4일 당 기관지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 총비서는 전날 최고인민회의 15기의 1차 회의를 계기로 이뤄진 시정연설에서 "우리의 적수들이 대결을 선택하든, 평화적 공존을 선택하든 그것은 그들이 택할 몫"이라며 어떤 선택에도 대응할 준비가 돼 있다고 주장했다.

김 총비서는 미국을 향해서는 제국주의와 패권 세력의 침략성을 거론하며 반미 기조를 재확인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직접 겨냥해 비난하거나 북미 대화를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표현은 내놓지 않았다.

반면 대남 메시지는 훨씬 직설적이었다. 김 총비서는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공인하고 가장 명백한 언사와 행동으로 철저히 배척하고 무시하면서 다루어나가겠다"라며 "우리 공화국을 건드리는 한국의 행위에 대해서는 추호의 고려나 사소한 주춤도 없이 무자비하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라고 말했다. 남측을 더 이상 대화의 상대로 보지 않는다는 적개심을 강화한 셈이다.

유화책에도 불구하고 남북 단절 구조 고착…미국은 '전략적 관리'?

이번 김 총비서의 시정연설은 북한이 '남북 두 국가' 정책과 관련된 내용을 헌법에 반영할 것으로 예상된 최고인민회의를 계기로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실제 '두 국가' 정책의 주요 내용을 헌법에 반영했는지 공개하진 않았지만, 김 총비서의 연설로 봤을 때 관련 조치가 결국 이행됐을 것이라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이재명 정부는 지난해 6월 공식 출범 후 꾸준히 대북 유화책을 펼쳐 왔지만, 북한의 대남 기조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만일 '두 국가' 정책이 이번 회의를 통해 실제 헌법에 반영됐다면, 북한 내부적으로 이를 부각하고 각인하기 위한 적대적 행보는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김 총비서는 미국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적대적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표현의 수위를 조절해 '관리'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지금 미국이 세계 도처에서 국가 테러와 침략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거나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우리 국가의 주변에 핵전략자산들을 상시적으로 끌어들이며 지역의 안전 근간을 흔들고 있다"라고 비난했으나 명시적인 대화 거부 메시지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이는 향후 북미 협상의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두지 않겠다는 판단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

김 총비서는 핵보유국 지위의 정당성과 핵무력 고도화의 필요성을 길게 설명하면서, 비핵화와 경제 보상을 맞바꾸는 식의 과거 협상 틀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점도 분명히 했는데, 이는 지난 2월 9차 노동당 대회에서 미국을 향해 "우리 국가의 현 지위(핵보유국)를 존중하며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한다면 우리도 미국과 좋게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며 '조건부 대화' 요건을 내건 것과 비슷한 맥락의 주장으로 보인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핵보유국' 입지 강화에 대해 "그 어떤 '확약'이나 '경제적 지원'과는 대비할 수 없는 거대한 결실을 전취했다"라고 자평한 김 총비서의 발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홍 선임연구위원은 "비핵화에 대한 보상식 합의나 경제 지원식 거래와는 거리를 두겠다는 것"이라며 김 총비서가 북미 대화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되, 핵을 포기하고 대가를 받는 협상 방식에는 선을 긋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봤다.

'마이웨이'가 더 중요한 北…韓 정권 교체 상관없는 '초강경 행보'

김 총비서는 이재명 정부 출범 후 △지난해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 △올해 2월 노동당 9차 대회 사업총화 보고에 이어 이번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까지 한국을 향해서는 유독 '대화의 조건'조차 내걸지 않는 한결같은 적대적 메시지를 유지하고 있다.

의아한 대목은 북한이 자신들에 대해 적대적인 기조를 강화하고 무인기 공작 등을 단행한 윤석열 정부 때 가했던 대남 비난과 비슷한 수준의 언사를 대북 유화책을 제시한 이재명 정부에서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어떤 메시지가 나와도 신경 쓰지 않는, 오로지 '마이웨이'에만 집중하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윤석열 정부 때인 2023년 12월에 시작한 '남북 두 국가' 정책의 '완성판'을 달성할 때까지는 이같은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와의 밀착을 통해 외교적으로 강력한 우군을 얻고, 경제 및 군사 분야에서 막대한 지원을 받은 만큼, 당장은 한미와의 관계 개선 수요보다 러시아·중국이 우선시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다만 한미에 대한 메시지의 톤이 다른 것은 미국에 더 많은 '기회요인'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이 상대를 보고 메시지를 조정하기보다 자신들의 대외 전략 기조에 맞춰 미국과 한국을 각각 다른 궤도로 다루고 있다"며 "남북관계는 접점 모색보다는 적대적 거리두기, 북미관계는 불신 속 전략적 관리라는 이중 구도로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홍민 선임연구위원은 "한국과는 대화나 유화보다는 상호 간섭하거나 침략하지 않는 '불가침' 차원의 상태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예상했다.

yeseul@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