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엔 조건부 손짓, 南은 '영구 배제'…'선택적 외교' 고수한 북한
미국과는 '핵보유국' 지위 조건으로 한 협상 가능성 시사
한국은 '영원한 적'이라며 대화 여지 완전히 차단…'붕괴' 위협까지
- 임여익 기자
(서울=뉴스1) 임여익 기자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미국을 향해 '핵보유국 지위' 인정을 조건으로 한 대화 가능성을 열어둔 반면, 한국은 '영원한 적'이라며 완전히 배척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북 공조를 강화하는 한미를 분리해 대응하는 '선택적 외교' 기조를 강화하면서 전략적 입지 강화를 노린 것이라는 분석이 26일 나온다.
'강 대 강'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미국에는 여지를 열어 두고, 남북관계에서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는 북한의 정세 판단이 다시 한번 확인되면서, 집권 2년 차를 맞은 이재명 정부의 한반도 평화 공존 정책 추진은 한동안 답보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전날 당 제9차 대회가 폐막한 사실을 전하면서 지난 20~21일 진행된 김 총비서의 사업 총화 보고의 주요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 보고에는 북한이 이번 당 대회에서 논의한 향후 5년간의 주요 정책 방향이 담겨있다.
김 총비서는 미국의 대북 정책을 비난하면서도 "미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헌법에 명기된 우리 국가의 현 지위를 존중하며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한다면 우리도 미국과 좋게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며 대화의 여지를 열어뒀다.
여기서 언급된 '우리 국가의 현 지위'는 북한이 '사회주의 헌법'에 스스로를 '핵보유국'으로 명시한 것을 가리킨다. '핵무력정책법'으로 불리는 북한의 법인 '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하여'(2022년 채택)에 따르면 북한은 자신들이 '책임적 핵무기보유국'이며 이를 법제화한 것은 핵보유국 사이의 '오판'과 무기 사용의 남용을 막기 위해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법을 채택한 뒤 북한은 '비핵화'가 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비핵화를 위한 협상에 나서지 않겠다고 주장하며 국제사회가 자신들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기를 맞아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핵보유국(Nuclear weapon state)은 아니지만 이에 준하는 표현인 '뉴클리어 파워'(Nulcear power)로 부르고 있는데, 북한은 이보다 더 진전된 표현과 미 행정부 차원의 '공식 인정'을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핵 비확산을 중요한 가치로 삼고,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안정적 상황 관리를 원하는 미국의 이익과 부합하진 않는다. 일각에선 북한이 미국에 의도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조건'을 내걸면서 정세 악화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고 러시아, 중국과의 '위험한 밀착'의 명분을 찾으려는 의도로 보기도 한다. 김 총비서도 사업 총화 보고에서 "조미(북미) 관계의 전망성은 미국 측의 태도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라며 '잘못되면 미국 탓'이라는 프레임을 세웠다.
한편으론 북한이 '트럼프'가 아닌 '미국'과의 실질적 협상을 원하는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재선에 도전할 수 없는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3년 남은 상황에서, 지난 2018년과 같이 '정상 대 정상'의 외교를 하는 것이 실효성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서다.
그 때문에 북한은 미국의 행정부가 바뀌어도 '핵보유국' 지위가 유효할 수 있도록 트럼프 대통령의 인정이 아닌 미 행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문서 등을 통한 인정을 추구하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특히 이는 반드시 트럼프 행정부와 '결판'을 낼 필요는 없다는 차원에서, 북한은 북미 대화를 장기전으로 보고 전략적 입지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과 마찬가지로 '일단 만나자'는 식의 대화를 제의해도 북한이 호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어떤 전략을 세우고 있든, 당장 북미 대화가 급한 쪽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차원에서다.
반면, 김 총비서는 한국에 대해서는 '그 어떤 조건도 없는' 초강경 단절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는 "한국을 동족이라는 범주에서 영원히 배제할 것"이라며 "한국을 철저한 적대국, 영원한 적으로 다루어나가려는 우리의 결심과 의지는 강고하며 결론적"이라고 밝혔다. 지난 2023년 연말 전원회의에서 처음 선언한 '적대적 두 국가'라는 새로운 대남 기조가 유효하며, 오히려 이를 더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다.
김 총비서는 이재명 정부의 대북 유화 정책에 대해서도 "서투른 기만극이고 졸작"이라고 평가절하하며, "우리가 가장 신성시하는 존엄과 권익에 부합되는 노선상에서 한국을 배제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들은 앞으로 더 명백하고 실천성 있게 강구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김 총비서가 이번 당 대회에서 밝힌 대미·대남 정책의 기조는 그가 지난해 9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밝힌 방향성과 대부분 일치한다. 하지만 당시는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동력이 최고조에 올라 있었고, 갓 출범한 이재명 정부에 대한 기대감도 가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결정적 분기점'을 만들지 못한 한미에 대한 김 총비서의 기대가 더 떨어졌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김 총비서는 한국과 '대화하지 않는다'는 기조를 넘어 상당히 공세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한국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와의 모든 것을 단념하고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라거나 "한국과의 연계가 완전히 소거된 현 상태를 영구화하고 어떤 경우에도 오도된 과거를 되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한 언급을 내놨다.
특히 "핵보유국의 문전에서 실행되는 한국의 부잡스러운 행동이 우리의 안전환경을 다치게 하면 임의의 행동을 개시할 것"이라며 "그럴 경우 한국의 완전 붕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는 고강도 위협도 가했다. 마치 과거 한국 정부에서 '북한 정권 소멸'을 언급한 것과 유사한 뉘앙스로 읽힌다.
전문가들은 현재 러시아와의 공고한 밀착관계 속에서 '핵보유국'으로서의 자신감을 과시하는 북한이 앞으로도 한미를 다른 기준으로 대하는 대외정책을 고수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한미의 공조에 균열을 낸다는 의도도 있다는 분석이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김정은의 9차 당 대회 사업 총화 보고는 그간 대남 전략의 근간을 뿌리째 바꾸는 변곡점이자 역대급으로 호전적인 대남 선언에 해당한다"면서 "비핵화 요구를 포함해 많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거는 남측의 유화 정책에 매달릴 이유가 전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임 교수는 그러면서 "북한이 한국을 '타국'이자 '적국'으로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유사시 같은 민족에게 핵을 쓴다는 정치적 부담을 덜고 선제 타격을 포함한 물리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위협까지 시사하고 있다"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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