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 준수형 경협 모델' 실현 가능할까[한반도 GPS]
- 유민주 기자
(서울=뉴스1) 유민주 기자 = 정부가 남북관계 회복에 주력하면서, 남북 간 '훈풍'이 불고 교류협력사업이 재개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가진 수많은 민간 대북 사업자들이 대북제재 '해제'를 전제로 사업 모델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다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나 미국의 독자제재 등 북한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제재는 전 세계 금융망, 무역망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점에서 단시간에 풀릴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매우 작습니다.
정부가 민간 교류 활성화를 위해 대북 접촉을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등 교류협력과 대화를 추동하는 것 못지않게, 이제는 상수가 된 대북제재와 북한의 '남북 두 국가론' 선포로 높아진 장벽을 동시에 고려해 정부 차원에서도 현실성 있는 '경협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27일 나옵니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은 물자와 자금이 들어가는 대북 사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원회의 제재 면제 승인을 얻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보리의 의사결정 방식은 상임이사국인 미국·중국·러시아·영국·프랑스 중 한 국가라도 반대하면 그 결정을 되돌릴 수 없게 돼 있습니다.
그간 안보리가 대북제재를 면제해 준 사업들은 대부분 인도주의적 지원에 국한됐습니다. 그 때문에 남북이 상호 교류와 협력을 위한 당국 차원의 사업을 전개하겠다면서 이와 관련한 대북제재 면제를 신청한다면, 대북제재위와 안보리의 승인을 얻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입니다.
만일 안보리의 승인을 받더라도 미국의 독자 대북제재가 넘어야 할 더 큰 산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북한의 불법적 사업과 연관이 있을 경우 이와 연결된 모든 계좌를 동결하고 개인의 입국을 막는 미국의 독자제재가 강제력이 낮은 안보리의 제재 결의안보다 국제사회에선 더 큰 영향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은 기업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세컨더리 보이콧은 미국이 자신들과 직접 연관이 없는 사업을 하는 기업이나 개인도, 그 행위가 북한을 이롭게 한다면 제재 대상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필요시 미국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일부 제재는 유예할 수 있지만, 대통령도 의회와의 충분한 소통을 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사안에 따라 미국 의회가 행정명령의 취소 및 위헌 소송을 제기하는 등 의도와 달리 더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이어지며 오히려 교류를 막는 장벽이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지난 2006년 북한의 첫 핵실험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20여년의 역사로 구축된 대북제재 체제는 생각보다 공고합니다.
문재인 정부 때 추진한 남북 협력사업 대부분이 유엔의 대북제재와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으로 착수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사업은 2018년 4·27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의 합의사항이었지만, 공사에 필요한 자재와 장비 반입이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 2321호, 2371호, 2397호에 명시된 제재 대상으로 확인되면서 난항을 겪었습니다.
정부는 우선 착공식부터 진행한다는 취지로 착공식에 필요한 장비, 유류, 통신기기, 차량 등에 대한 제재 면제를 요청하고 미국과의 협의, 안보리 이사국 검토 과정을 거쳐 약 한 달 만에 제재 면제 승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재가 해제된 것은 아니기에 착공식 이후의 공사를 위해서는 또 다른 제재 면제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사업의 실효성에 의구심을 제기했고, 미국도 한국이 주도적으로 남북 간 사업을 추진하는 것에 크게 호응하지 않으면서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사업은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사실상 무산됐습니다.
그간 한국 정부는 사실 대북제재와 관련해 미국을 설득해 제재의 완화 혹은 해제를 끌어낸다는 구상 외에 다른 방안을 찾지 못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변화의 조짐이 보입니다.
통일부 평화교류실은 대북제재 및 국제협력 관련 업무에서 영어 통·번역 담당자를 처음으로 '공무직 근로자'로 채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직무는 필요시 계약직으로만 채용됐지만, 유엔 및 미국의 제재에 대한 '수준 높은' 번역이 상시 업무가 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에 따라 올해부터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습니다.
이에 따라 외교부가 아닌 대북 주무부처 내에서도 미국의 독자제재 등 관련 규정 등에 대해 더 연속성 있는 모니터링 작업과 다양한 방식의 해석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제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교류협력 방안을 찾아보자는, '제재 준수형 경협 모델'을 찾기 위한 것이라는 관측도 나옵니다.
정부의 정책에 깊이 있는 자문을 하는 국가안보전략연구원(전략연)의 임수호 책임연구위원도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제재를 완화 혹은 해제하는 것은 어려움이 크기 때문에 유엔이나 미국의 제재의 '유예 조항'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제언했습니다.
임 연구위원에 따르면 미국의 독자제재를 규정하는 14개의 법률 중 하나인 '대북제재강화법'은 인도적 목적에 따라 필요한 경우 1개월에서 1년간 제재 유예를 허용하고 있는데, '한반도의 민주·평화적 통일 촉진'도 인도적 목적 중 하나로 규정돼 있어 이를 대북 양자·다자 경제 협력의 명분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짚었습니다.
제재를 대하는 국제사회의 방식에도 변화가 있다는 분석도 제기됩니다. 이지선 전략연 안보전략연구실 평화개발협력센터장의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2022년에 제정된 유엔 안보리 결의 2664호에는 다른 안보리 결의안에는 없는 '상설 인도주의 예외 규정'이 신설됐습니다.
이는 그간 제재 면제를 위해 한 사업 내에서도 물자가 이동할 때마다 건별로 승인을 받아야 하는 불편함을 '포괄적 면제 승인' 방식으로 간소화해 사업의 효용성을 확보하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또 지난 8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 전후로는 러시아 관련 특정 금융 제재가 회담 준비를 위해 한시적으로 완화되며 향후 미국의 조건부 대러 제재 완화 가능성이 커지기도 했습니다.
이 사례에는 미국이 관여돼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중요한 함의가 있습니다. 적어도 트럼프 행정부는 자신들이 관여하고 싶은 사업에 있어서는 제재를 우회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에 적극적이며, 이를 외교적 협상의 영역으로 가져간다는 의도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이러한 점을 잘 파고든다면, 미국의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제재의 전면적 완화·해제보다 빠르고 당장 필요한 조치를 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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