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통일원→통일원→통일부…역사 따라 굴곡졌던 통일부 위상

[통일부 이름 바뀔까]①남북관계 따라 '부총리급' 격상에서 '폐지' 위기 오가
정부 따라 조직 및 역할 변화 있었지만 '통일' 목표는 계속 유지

편집자주 ...통일부는 그간 정권 변화나 남북관계의 부침에 따라 그 위상과 역할의 진폭이 심했다. 최근에는 변화된 정세에 따라 통일부의 이름에서 '통일'을 빼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통일부의 역사와 함께, 통일부의 명칭 변경에 대한 찬성, 반대 주장과 그 논리를 짚어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토통일원 현판을 걸고 있는 모습.(통일부 제공)

(서울=뉴스1) 최소망 기자 =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통일부'가 명칭 변경 논란에 휩싸였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명칭 변경을 진지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는 의견을 밝히면서다. 새 정부의 '남북관계 복원', '남북 간 평화 공존' 기조에 따라 주무 부처인 통일부의 역할과 위상 정립 변경의 당위성은 공감대를 얻는 분위기지만 명칭 변경에 대한 의견은 가운데로 모이지 않고 있다.

'국토통일원'으로 시작…공세적 통일 정책, 남북 첫 합의로 '격변'

통일부는 지난 56년간 정권의 부침과 남북관계 흐름에 따라 그 위상과 역할에도 많은 굴곡을 겪었다.

박정희 정권은 지난 1969년 3월 1일 '국토통일원'을 창설했다. '국토'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은 당시에는 통일이 곧 '영토 회복'이라는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국토통일원의 주 업무는 남북 대화나 교류 추진보다는 각종 통일 방안을 조사·연구하고, 통일 후의 제반 정책 및 국토 통일에 관한 홍보, 선전에 관한 사무에 집중됐다.

1970년 즈음 한국전쟁 후 첫 남북대화와 물자 교류 시대를 맞이하며 국토통일원의 역할도 대화와 교류 관련 정책을 구상하는 것으로 확장됐다. 1972년엔 분단 후 남북의 첫 합의이자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라는 3대 원칙을 제시한 '7·4 남북 공동성명'이 채택됐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에도 남북의 대화와 공존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고, 1980년 후반부터 1990년까지 전 세계적인 탈냉전의 흐름 속에서 정부도 남북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정책 전환을 모색하게 됐다. 1985년엔 첫 이산가족 상봉도 열렸다.

이런 흐름 속에서 1990년 12월 27일 국토통일원의 이름은 '통일원'으로 변경됐다. '국토'가 빠진 것은 우리 사회의 통일 인식이 공세적인 '영토 회복'에서 '남북의 대화'를 통한 평화적 방식의 통일이 낫다는 쪽으로 바뀌었음을 시사한다.

노태우 정권은 1991년 12월 북한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이는 남북 간 '불가침'을 처음으로 합의한 문서로, 이후 '민족·통일' 중심의 남북관계의 주요 합의서의 근간이 된 역사적 합의문이다.

통일원은 각종 남북회담이나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간 대화·협력에 관한 종합적 기본 정책의 수립과 그에 관한 기획의 종합·조정, 통일 교육 등 기타 통일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다.

현재 통일부 업무의 기본 골자가 이때 짜였다고 볼 수 있다. 장관도 부총리급으로 격상되며 통일원의 입지가 크게 올랐던 시절이기도 하다.

남산 위치해 있던 국토통일원 전경.(통일부 제공)
남북 대화·교류의 전성기 맞아 '최고의 위상' 다져…북핵으로 존폐 위기

'햇볕정책'을 앞세운 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 2월, 통일원은 통일부로 다시 한번 이름을 바꿨다. IMF 경제위기 직후 행정조직의 간소화·정부 조직 축소 기조에 따라 통일부 장관은 부총리직을 맡을 수 없게 됐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성공으로 통일부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최고의 전성기'로 불릴 정도로 대단했다.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과 금강산 관광 개시, 개성공단 착공 합의 등 남북 교류와 대화의 역사에서 굵직한 사건이 이때 발생했다.

노무현 정부 때도 이러한 통일부의 위상은 이어졌다.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정동영 후보자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을 맡을 정도였다.

하지만 2006년 북한의 첫 핵실험이 단행되면서 모든 상황이 급변했다. 남북관계는 크게 얼어붙었고, 북한의 핵 개발의 책임을 통일부가 져야 하는 분위기가 됐다.

이명박 정부 들어 북한의 핵실험이 반복되고 북핵 6자회담이 열리는 등 북한 문제가 북핵을 중심으로 주로 외교의 장에서 다뤄지자 '통일부 폐지론'이 나오기도 했다. 통일부의 기능을 외교부로 흡수해 대북 외교의 한 파트를 맡게 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실제 폐지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통일부는 그 위상과 조직 규모가 축소되는 부침을 겪었다.

통일부명칭 변경 연혁.ⓒ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인권·교육으로 영역 확대…'역대급 대화' 열렸으나 북핵 문턱 못 넘어

박근혜 정부는 전 정부 시절에 발생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등으로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남북관계를 대화로 풀어보려 했다. 당시에도 대화의 전면에 통일부가 나서며 위상이 회복되는 듯했으나, 첫 장관급 회담이 개최 하루 전 무산되고, 북한이 다시 핵 능력을 고도화하며 정부는 개성공단 가동 중단이라는 고강도 조치로 응수해 남북관계가 다시 악화했다.

박근혜 정부 때 통일부는 새로운 영역으로 업무를 확산하는 데 공을 들였다. 북한 인권 문제를 새로 정립해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를 다룰 수 있게 했으며 국내의 통일교육 방식 및 기반의 재정비도 이때 이뤄지는 등 통일부의 고유 업무가 확장되는 모습을 보였다.

문재인 정부의 통일부는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등 교류와 협력의 시대를 다시 열었다. 그러나 장기화된 북핵 문제로 인한 정세의 변화를 대화로만 뚫기 어려웠다. 북한도 통일부보다 청와대를 직접 상대하는 방식의 대화를 전개하며 통일부의 위상을 '도약'시키진 못했다.

북한의 셈법도 바뀌었다. 북미 정상회담과 북핵 협상을 경험한 북한은 '핵을 가진 외교'에 남북관계가 필수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난 2020년 북한이 남북 연락사무소를 폭파 방식으로 파괴한 것은 이러한 셈법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통일부를 '대북지원부'로 규정하며 15% 가까운 인원을 감축했다. 다시 불거진 통일부 폐지론 속에서, 통일부의 주요 업무는 북한 인권 문제 대응과 대북 정보 입수 및 분석으로 이동했다. 특히 윤석열 정부 때는 새 전략자산 개발에 집중한 북한의 고강도 도발이 집중됐고, 남북 간 전단 및 오물풍선 살포로 인한 갈등이 격화되면서 9·19 남북 군사합의의 파기가 이뤄지는 등 군사적 긴장이 크게 고조됐다.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긴장된 남북관계는 일단 숨을 돌리는 모양새다. 새 정부는 '긴장 완화'를 첫 번째 목표로 삼고 각종 정책을 이행하고 있고, 북한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하에 북한이 기피하는 '통일'을 뺀 새로운 이름(남북관계부, 남북협력부 등)을 내세울지를 검토 중이다.

기본적인 구상의 바탕에는 '시대상'을 반영한 새로운 남북관계의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깔린 것으로 알려졌다. 새 장관이 취임하면 본격적으로 정부 차원의 논의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내 통일부의 모습. 2023.7.28/뉴스1 ⓒ News1 이재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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