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손짓엔 침묵…中·러 업은 김정은, '핵보유 인정' 담판 수싸움

중·러 뒷배·경제 회복으로 8년 전보다 여유…美 후속 조치 주시
"비핵화 빠진 북미 관계 개선 합의, '핵보유국 기정사실화' 분기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첫 임기 때인 2018년 6월 12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센토사 섬의 카펠라 호텔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와 합의문을 발표한 후 악수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서울=뉴스1) 한상희 기자 = 북한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잇단 대화 손짓에도 일주일 넘게 추가 대미 메시지를 내놓지 않고 있다. 핵무력 고도화와 중국·러시아와의 협력으로 2018~2019년 때보다 선택지가 넓어진 만큼 미국의 후속 조치를 지켜보며 협상의 문턱을 높이려는 것으로 27일 풀이된다.

향후 대화가 성사되더라도 북한은 과거의 '비핵화 대 제재 완화' 방식이 아니라 핵보유를 전제로 관계 개선을 시도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성사를 위해 비핵화를 뒤로 미룰 경우 북미 대화 자체가 북한의 핵보유를 사실상 용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북한은 지난 19일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이 담화를 낸 후 추가적인 대미 메시지를 내지 않고 있다. 관영매체인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통신 등에도 관련 보도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는 뉴스1과의 통화에서 "북한이 대화의 문을 닫지도, 열지도 않은 상태에서 미국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겠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과거보다 느긋해진 북한의 태도에는 달라진 대외 환경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북중 교역액은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의 98.1% 수준까지 회복됐고, 지난 6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 이후 고위급 교류도 활발해졌다.

러시아와는 파병과 무기 지원을 매개로 군사·경제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북한은 러시아에 152㎜ 포탄으로 환산해 1500만 발이 넘는 탄약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반대급부로 우크라이나전에서 축적된 실전 운용 자료와 러시아의 군사기술·부품을 확보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북한 경제도 3년 연속 3%대 성장세를 보였다. 지난해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대북제재가 본격화한 2017년 수준을 넘어섰다.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제재를 풀어야 할 절박성이 북미의 마지막 정상회담이었던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 때보다 낮아진 셈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통화에서 "북한이 2018~2019년에는 모든 것을 걸고 미국과의 대화로 가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며 "국제 정세 변화로 북한이 과거보다 급하지 않게 기다릴 여지가 생겼고, 미국이 확실히 태도를 바꿨다는 신호가 나오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과 러시아에도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커졌다. 중국에 북한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외교적, 지리적으로 중요한 파트너다. 러시아 쪽으로 기운 북한을 자국의 영향권에 묶어놓을 필요성도 커졌다. 러시아에 북한은 우크라이나전 수행에 필요한 병력과 탄약을 공급하고 서방에 공동 대응하는 군사협력 파트너다. 북한은 이처럼 중·러 양국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구도를 대미 협상력을 높이는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19년 하노이 회담 당시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와 주요 민생 제재 해제를 맞바꾸는 '부분 비핵화'를 제안했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협상의 기준점이 비핵화 조치와 제재 완화의 교환이었다면, 지금은 북한이 회담 성사 조건으로 '북핵 공인'을 내세우고 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연합연습 축소와 연내 정상회담 의사를 잇달아 밝히며 유화 제스처를 보낸 뒤 북한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비핵화 뺀 군비통제 담판 가능성…9월 최고인민회의 때 김정은 메시지 주목

핵능력을 키우고 중·러를 통한 활로까지 확보한 북한은 이제 미국에게 협상장의 '입장료'를 받을 수 있는 입지가 됐다는 평가도 있다. 협상의 목표 역시 핵 일부를 포기하고 제재 해제와 경제적 보상을 받는 거래에서 핵보유를 전제로 미국과의 관계 자체를 재설정하는 방향으로 달라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홍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지금 바라보는 것은 기존처럼 핵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대가로 무언가를 받는 거래가 아니라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라며 "미국이 핵을 가진 북한과 관계를 개선한다는 것은 결국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공식 인정하지 않더라도 북미 정상이 만나 공동문건에서 비핵화를 제외한 채 관계 개선에 합의한다면 사실상 북한의 핵보유를 용인하는 효과가 날 수도 있다. 이 경우 북한이 2017년 '국가 핵무력 완성' 선언 이후 추진해 온 '핵보유 기정사실화' 전략에도 중요한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양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 총비서와 만나고 싶어도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그치지 말고 북한이 요구하는 실질적인 '행정 조치'를 내놔야 한다"며 "북한이 2018~2019년과 달리 여유를 갖고 미국의 행동을 기다리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김 총비서가 오는 9월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직접 대미 입장을 밝힐지도 주목된다. 시정연설에선 최고지도자가 대내외 정책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에 북미 대화와 향후 대미 협상에 대한 북한의 판단 혹은 구상을 확인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

angela0204@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