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헤엄쳤던 9살, 이제 부산 'K-뷰티 시장' 헤엄친다[경계를 건넌 사람들]

100만 원으로 창업…직원 198명 거느린 부산 미용 프랜차이즈로
중화권 플랫폼 후기 한 줄이 불씨…이슬람권 관광객까지 끌어모으다

편집자주 ...경계선을 넘어 새로운 삶에 정착한 이들. 정착 이후에도 크고 작은 경계를 극복해 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합니다. 지리적 경계만이 아니라 문화와 관계의 새로운 세계를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삶 위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몰랐고, 알아야 할 삶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겠습니다.

주식회사 누아르 송강우(34) 대표가 부산 미용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진행 중인 모습.(송강우 대표 제공)

(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 탈북민(북향민) 사회에 성공한 사업가가 있다면 으레 서울에서의 '성공 스토리'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주식회사 누아르 송강우(34) 대표는 성공을 위해 서울이 아닌 부산을 택했다. 지금 그는 부산에서 미용실 6개, 미용아카데미, 200평 규모의 교육장을 운영하며 직원 198명을 이끌고 있다. 올 5월엔 광안대교가 훤히 보이는 곳에 새 매장을 열었다.

누아르 서면 본점엔 요즘 중화권과 서양권 관광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K-뷰티'를 경험하러 부산을 찾은 외국인 손님이 내국인보다 많아진 지 꽤 됐다. 내국인 대 외국인 비율이 4 대 6 정도라고 한다. 탈북민이 K-뷰티 열풍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이 낯설게도 느껴졌지만, 그가 걸어온 길을 들으며 생각이 달라졌다.

"놀러 가자"는 한마디에 따라나섰다

2003년 평안남도에서 탈북한 송 대표는 당시 아홉 살이었다. 동네 어른의 "놀러 가자"는 한마디에 따라나섰다가 신의주까지 걸어가 그길로 압록강을 헤엄쳐 건넜다. 위험한 구간에선 걷고, 때때로 트럭도 얻어 탔다. 어릴 적부터 동네의 큰 강에서 수영을 익혔던 덕에 압록강을 건너는 것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중국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한국 땅을 밟은 건 2005년. 탈북 여정에 쓴 시간만 1년이 넘었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그를 도운 건 한인 목사의 시설이었다. 그곳에서 한국 콘텐츠가 담긴 CD와 DVD를 처음 접했다. 처음 본 영화는 '태극기 휘날리며'였다.

"이야, 재밌구나."

한국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서울에선 위탁가정 생활을 했지만 낯선 가족 관계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안학교 '하늘꿈학교'를 다니며 스스로 PC방을 찾아가 진로를 검색하고, 직접 전화를 걸어 학교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진로를 고민할 때 그의 기준은 단순했다. 부모 도움 없이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체력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직업체험을 거쳐 미용을 택했다. 탈북민들이 많이 선택한다는 경찰행정 쪽도 생각해 봤지만, 군 면제인 자신이 제복을 입는 게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명지전문대학교 뷰티과를 졸업하고 서울 건대 인근 미용실에서 1년 넘게 일했다. 그러다 바다가 좋아 연고 하나 없는 부산행을 택했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저한테는 똑같았어요. 아무 연고가 없는 건 마찬가지니까."

부산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아내도 미용사였다. 벌써 다섯살 된 아들도 행복하게 자라고 있다.

올 5월 새로 문을 연 누아르헤어 광안리점에 서 있는 송강우 대표. 2026.5.13 ⓒ 뉴스1 김예슬 기자
통장에 100만 원, 다시 시작

부산 정착 후 첫 창업을 하필 코로나19 팬데믹 때 했다. 서면 전포동에 문을 열었다가 얼마 못 가 닫아야 했다. 통장에 남은 돈은 100만 원이었지만, 아내의 배속에 아이가 있었다. 막막했지만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다시 미용실로 한 번 더 해보자 싶었어요. 여기서 무너지면 다 무너지니까."

그가 먼저 한 일은 왜 망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데이터를 분석하고, 나름의 대안을 마련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3년째 비어 있던 공실의 건물주를 직접 찾아가 "제 사정이 이런데, 3~4개월 뒤엔 무조건 보증금을 치르겠습니다. 렌트프리로 시작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곡하게 문을 두드렸다. 건물주가 손을 내밀었다. 3년 전 서면에 문을 연 그 매장이 누아르 본점이다.

아내와 둘이서만 조용히 꾸려갈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을 모아 일을 키웠다.

"망하고 나서 통장에 100만 원 가지고 미용실을 오픈하는 사람이 와이프랑 둘이 작게 하는 게 맞나 싶었어요."

그의 손을 거친 제자들은 이제 모두 원장이다. 그는 수시로 제자들에게 "내가 피눈물 흘리며 겪은 실패를 너희는 똑같이 겪지 말라"고 당부한다.

송강우 대표가 쌀 1톤 기부 행사에 각 지점 원장들과 함께한 모습.(송강우 대표 제공)
"개천에서 용 나면 죽는 나라에서 왔다"

서면 본점이 외국인 고객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건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됐다. 한 외국인 고객에게 무료로 헤어 시술을 제공했는데, 이 고객이 중화권 플랫폼에 후기를 올리면서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중화권 관광객이 가파르게 늘었고, 최근에는 매장 한 곳에 월 500명 수준까지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이슬람권 관광객 포섭에도 나섰다. 히잡을 쓰는 종교적 특성을 고려해 분리된 개인룸도 마련했다. 서면 2곳, 광안리 2곳, 다대포, 사직, 오픈 준비 중인 남포동까지 매장을 확장했고, 연산동 교육장에서는 후배 미용사들을 키워내고 있다. 중국·태국·베트남을 겨냥한 온라인 교육사업을 병행하면서 내년엔 현지 진출까지 준비 중이다. K-뷰티 기술을 동남아시아 시장에 온라인으로 수출하겠다는 구상이다.

대학 강의도 병행하는 그가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자본주의라서 너무 좋다. 내가 피땀 흘린 만큼 얻어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요즘 청년들이 '헬조선'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면 "진짜 헬조선을 경험해 보고 싶으면 북한 한번 보내줄까"라고 웃으며 받아친다고 했다. 그는 "북한에선 개천에서 용이 나면 무조건 죽는다"라고 말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용이 될 수 없는 사회에서 자라왔기에, 노력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겐 여전히 감격이다.

어머니와 여덟 살 터울의 남동생도 뒤늦게 한국에 왔다. 고향으로 브로커를 직접 보내 데려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2011년 12월) 직후여서 국경 통과 비용이 두 배로 뛰었을 때다. 어머니는 지금 강원도에서 농사를 짓고, 동생은 신학대학원에서 목사 과정을 밟고 있다.

"내리막이 나타나면 내려갈 줄도 알아야 또 추진력을 얻어 더 높이 점프할 수 있다는 걸 사업하면서 배웠어요."

실패를 두 번 겪었고, 아직 서른넷이다. 많은 내리막과 오르막이 또 나타날 것이지만, 얼마든 내려갈 수 있는 자신이 생겼다.

※뉴스1·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yeseul@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