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만든 경계 위의 삶…예술로 되살린 분단의 기억 [155마일]

진나래 비무장사람들 대표 인터뷰
납북된 외할아버지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잊힌 존재들' 기록

편집자주 ...155마일은 남북 사이에 놓인 군사분계선의 길이입니다. 이 경계의 실체는 선명하지만, 경계에 가려진 사실은 투명하지 않습니다. 분단의 현실을 직시하되, 경계 너머 북한을 제대로 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겠습니다.

'K의 계보 - 냉전 관광객으로 분장한 진나래', 2016 (진나래 제공)

(서울=뉴스1) 유민주 기자 = 전쟁으로 한순간 국적이 바뀐 사람들이 정착한 땅이 있다. 1945년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이 그어진 당시에는 북한에 속했지만, 이후 약 250㎞ 길이의 휴전선(군사분계선)이 생기면서 남한으로 편입된 '수복지구'(收復地區)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 협정으로 군사분계선과 38선 사이의 땅들은 운명이 바뀌었다. 북한에 내준 서부전선의 일부 지역은 북한 입장에서 '신(新)해방지구'로, 대한민국은 본래 북한 영토였던 38선 이북~군사분계선 이남 지역을 수복지구로 불렀다. 경기도 연천, 강원도 양양, 고성, 인제, 양구, 화천, 철원 등이 해당한다.

지난 21일 뉴스1과 만난 진나래 작가는 시대의 격변 속에서 집을 떠나온 사람들, 혹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던 사람들이 자리 잡은 그 경계의 땅과 분단을 기억하는 삶을 기록해 왔다.

"역사를 기록한다기보다는, 전쟁 속에서 '보통의 사람'과 그 가족들이 겪었던 일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정치적 이념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흐르는 세월 속에서 일상을 영위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죠. 전쟁을 치러내야만 했던 개인의 삶과 심리가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해요."

진 작가는 2016년 베를린에서 납북 할아버지를 다루는 'K의 계보' 작업을 한 이후, 경기 북부와 접경 지역에서 활동하며 2017년 경기북부 마을 아카이브 '서부전선 DMZ프로젝트', 2018년 '실향민 공유 밥상', 2019년 'DMZ 내일 밥상', 2020~2023년 연천 신망리 에코뮤지엄 등 다수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21년에는 분단 상황에 대해 예술적 방식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시각예술가와 큐레이터로 구성된 '비무장사람들'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고 '기억하는 건축, 보이지 않는 마을', '레클리스 재건단' 등의 수복지역 건축물과 사람들을 조사하고 가시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em>진나래, 출판물 'K의 계보' 내지, 추르추르프레스 .</em> 납북된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이 담겼다. (진나래 제공)
존재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외할아버지'

진 작가가 접경지역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끌리게 된 건 삼십년 가까이 잘 알지 못했던 가족사를 듣게 되면서였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해, 작가의 어머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도 뵌 적 없는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외할아버지는 한국전쟁 기간 중 납북됐고 일본 유학 때는 사회주의를 배웠다는 소문이 돌아 일가족이 서울에서 쫓겨나 경기도에 자리를 잡게 됐다고 한다.

남겨진 가족은 이산의 아픔을 가슴 속에 묻어두고 새로운 동네에 온전히 정착하고 살아남기 위해 외할아버지의 존재를 모두 지운 허구의 가족사를 지어내 살았다. 진 작가는 그동안 외할머니라고 알고 있던 분이 사실은 진짜 외할머니가 아니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이 일을 계기로 시작한 'K의 계보' 프로젝트는 진 작가가 냉전 관광으로 유명한 베를린을 여행하며 납북된 외할아버지에게 보내지 못할 여행 엽서를 쓰는 허구적 에세이 작업이다. 실재하는 것을 재조합해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는 '컷 앤 페이스트'(cut and paste) 작업 형식으로, 진실과 허구 사이의 존재를 구현해 냈다.

이를 통해 이념 전쟁이 한 평범한 가족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사회 기저에 깔린 '심리적 정치'를 조망하고자 했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지만, 진 작가는 다양한 자료를 베이스로 그때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프로젝트에 녹였다.

"누군가 저를 미행하면서 찍은 것처럼 사진을 연출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당시 기억을 가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서 완전히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낸 거죠. 외할아버지의 존재는 부정될 수밖에 없었지만, 써내고 싶었어요."
<em>진나래 'K의 계보 - 김청진에 의해 촬영된 진나래의 행적 증거' , 2016 (진나래 제공)</em>
"분단이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다"

진 작가가 2017년 경기 연천군 신망리역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주민 어르신들을 인터뷰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분단이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다"이다. '조금 있다 통일되면 다시 올라간다' 이런 생각으로 마을에 남았던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1954년 미군의 원조로 주민들이 직접 100채의 가옥을 지으면서 생겨난 마을로, '새로운 희망의 마을'(신망리, New hope town)이라는 뜻의 이름을 미군이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피난민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살 집을 정했는데, 이때 가옥은 1호, 2호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2018년까지만 해도 구호주택이 남아 있었지만 이제 전부 사라졌다.

전쟁 후 먹고살기 위해 신망리에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한때 북한이었던 지역이었다는 이유로 일대 주민들은 북한의 '인민'과 유엔군정의 '주민'을 거쳐 남한의 '국민'으로 살아야 했다. 주민들은 유엔군에서 남한으로 행정권이 이양된 이후에도 엄격한 사상 교육과 감시를 받았다.

진 작가는 2020년 경기문화재단의 에코뮤지엄 사업을 통해 신망리 간이역과 그 인근에 마을의 역사를 알리는 '작은 마을 박물관'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 1956년 주민들이 직접 만든 마을의 간이역은 2019년 초까지 운행하다 영업을 중단했다.

"접경지역이라고 하면 사실 굉장히 긴장감 넘치고 위험한 동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 수 있는데, 예상보다 평화로워서 놀랐어요. 적어도 외지인이 보기에는 그랬어요. 어르신들이 해주신 이야기들은 마냥 밝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개발이 느린 곳이다 보니 오히려 '커뮤니티'가 살아있는 느낌이었어요. 물론 군인들도 많이 보이고, 가끔씩 대북방송도 들렸지만, 우리가 그간 후방에서 미디어를 통해 상상한 이미지와는 분명 달랐던 거죠."

물론 이 마을에는 수복지구의 특수성이 드러나는 사연도 많다. 지뢰 사고로 지인이나 가족을 잃은 이야기, 휴전선이나 군사분계선을 상징하는 '철책'이 있기 전엔 월북하는 사례가 많아 가택 수색이나 고발, 사상 검증이 빈번했던 이야기, 폭격이나 수색에 대비해 집집마다 방공호를 만들었던 이야기 등이다.

이는 50년 넘게 같은 집을 지키며 살게 된 어르신들이 가슴속에 간직해온 전쟁의 파편들이기도 하다.

연천 신망리 구호주택. 2018년 철거됐다. (진나래 제공)
재건 사업 '체험 프로젝트' 준비…전후 미군 원조사업 공부는 계속

올해는 연천군 백학면에서 과거 주민들이 직접 집을 지었던 방식을 일반 시민들이 재현해 볼 수 있는 사업의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미군의 일부 자재 지원이 있긴 했지만, 전쟁 이후 주민들이 직접 자기가 살 곳을 지었던 그 '마음'을 살피는 일이기도 하다. 사전 조사 등을 통해 과거 이곳에 존재했던 천막촌 자료를 참고해 재활용이 가능한 비닐로 천막을 쳐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땅, 부동산 등이 모두 제도화돼 개인이 마음먹은 대로 집을 짓기 쉽지 않죠. 집을 짓는 행위에는 사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고자 하는 의지가 내포돼 있다고 생각해요. 대단히 거대한 결과물일 필요는 없어요. 올해 어르신들에게 배운 흙벽 만드는 방법, 볏짚으로 초가집 지붕 만드는 법 등을 활용해 내년에는 시민들도 참여할 수 있는 재건 체험 프로그램을 시도해 볼 예정입니다."

지난달에는 연구자들과 함께 메릴랜드 칼리지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를 방문했다. 방대한 양의 아카이브에서 필요한 자료를 찾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전후 수복지구 재건사업 중 미군대한원조(AFAK) 자료 등 주로 한국전쟁 이후 미군 원조 사업과 관련된 자료들을 찾았다고 한다.

그는 이번 경험을 통해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 안에서 찾는 게 아니라 미군 자료라던가, 오히려 바깥에 나가서 더 많이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갈라진 가족이 과거사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했던 가족의 역사가 우리나라에만 있을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념 전쟁으로 인해 벌어진 심리, 사실은 그런 이념과는 상관없는 일반인들, 그런 분들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주목하고 싶어요. 소심하고, 어딘가에 붙잡혀가기 싫고, 조사받기 싫고, 대단히 깡다구 있거나 그런 게 아니라 일상적 수준에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고, 그분들이 삭제되거나 존재 자체가 없어졌다면 어떻게든 존재하게끔 써내고 싶습니다."

youmj@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