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판 범죄도시'…사랑으로 속인 92억 사기극의 전말 [사건의 재구성]

캄보디아 콜센터 '채터' 근무 30대…91명 상대 92억원 편취
1심서 징역 5년…재판부 "협박에 억지로 가담? 임무에 적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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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뉴스1) 김세은 기자 =

'고액 알바, 단기 가능, 최소 1만달러 이상'

지난해 3월 27일 30대 남성 A 씨는 "주식투자를 권유하는 일을 하면 월 1000만원 이상 벌 수 있다"는 텔레그램 구인 광고에 혹해 캄보디아행 비행기에 오른다.

낯선 땅에 도착한 그는 '콜센터'라 불리는 캄보디아 현지 사무실에서 합숙 생활을 시작한다.

평균 근무시간은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여권은 뺏기고, 휴식이나 외출도 엄격하게 통제받는다. 사무실에서 준 컴퓨터나 대포폰 외에는 사용하지 못하며, 조직원끼리는 가명으로 부르도록 요구받았다.

업무 교육을 마친 A 씨는 불특정 다수의 인적 사항이 적힌 명단과 시나리오 대본을 받았다. 그의 첫 임무는 명단에 적힌 이들과 채팅하면서 친분을 쌓고 투자 제안으로 연결하는, 이른바 1차 유인책 '채터'였다.

그는 이들에게 여자인 척 접근해 친분을 쌓았고 자연스럽게 '연인' 관계로 발전해 갔다. 서로 간 믿음과 감정이 깊어진 어느 날, 그는 문득 투자를 제안한다.

"나 외환 투자 공부하고 있는데 1200만원 수익을 냈어."

A 씨의 거짓말에 넘어간 이들은 자연스럽게 '투자 전문가'를 사칭하는 2차 유인책의 말도 믿기 시작한다.

A 씨 조직은 실제 뉴욕거래소에 등재된 외환거래소 데이터를 모방한 허위 사이트를 접속하게 하는가 하면, '딥페이크'로 만든 유튜브 영상을 보내 실제 전문가가 투자 정보를 알려주는 것처럼 치밀하게 속였다.

A 씨는 이 같은 수법으로 지난해 4월 13일부터 9월 13일까지 피해자 91명을 상대로 92억 원이 넘는 재산을 빼앗아 갔다. 이 중 한 피해자는 극단적 선택에 이르기도 했다.

이후 지난 3월 1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을 통해 이 사건이 알려지자 A 씨는 자신이 수배된 사실을 알게 됐고, 같은 달 12일 경찰에 자수했다.

그는 지난 6월 열린 공판에서 "고액 아르바이트로 알고 캄보디아에 갔다가 감금당한 채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범행에 가담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국내에서 직장 생활을 한 A 씨가 캄보디아에서 적법한 방법으로 월 1000만원이 넘는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을 것으로 봤다.

재판부는 "A 씨는 인사팀으로 업무가 바뀐 후 조직에 순응하고 주어진 임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했다"며 "A 씨가 캄보디아 체류하는 동안 개인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한국식당에서 밥이나 술을 먹고 들어오기도 해 완전히 감금된 상태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A 씨가 지난해 9월 베트남에 간 뒤 6개월간 여자 친구를 사귀고, 헬스장 개업을 준비하는 등 일상을 보낸 것에 대해 "범행에 가담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 사람의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범죄단체 가입, 범죄단체 활동,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으로 재판에 넘겨진 A 씨에게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했다. A 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상태다.

syk000120@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