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재조명되는 울산 출신 '일제치하 한글지킴이'외솔 최현배

최초 국어사전 '큰사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등

보물 지정 예고된 '조선말 큰사전 원고'(왼쪽부터 등록 제524-1호 한글 설명 부분, 등록 제524-2호-불국사 설명 부분, 문화재청 제공)ⓒ 뉴스1

(울산=뉴스1) 손연우 기자 = 울산이 낳은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의 업적이 그의 서거 50주년이자 574돌 한글날을 맞아 재조명되고 있다.

울산시는 매년 개최했던 '한글문화예술제'를 '외솔 한글한마당'으로 축제 명칭을 변경하고 전국최대 규모 한글날 행사를 진행한다.

9일부터 11일까지 중구 원도심 일원(동헌, 문화의 거리, 젊음의 거리)과 외솔기념관 등에서 열리는 '2020 외솔 한글한마당'은 '함께 즐기는 한글누리'를 주제로 진행되며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비대면·대면 방식이 병행된다.

울산시교육청은 '한글'을 주제로 발행한 '교육문화 계간지'에 외솔 최현재 선생의 탄생과 업적을 기리는 뜻을 담아 중구 외솔기념관과 외솔탐방길을 소개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시발점이 되는 갑오경장이 일어나던 1894년10월 19일 울산에서 태어나 일생을 국어연구와 국어운동으로 보냈다.

일제 치하에서 국어를 지키기 위한 그의 한글 연구는1920년 사립동래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부임해 우리말을 가르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외솔 최현배 선생ⓒ 뉴스1

1926년 선생은 민족이 다시 살아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조선민족 갱생의 도(道)'라는 글을 발표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1937년에는 일제 치하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어가 보존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리말을 집대성한 사전 '우리말본'을 출판, 국어 문법체계를 세우는데 기여했다.

1938년 선생은 이른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검거돼 수감생활을 했다. 흥업구락부사건은 일본이 중국침략 전 민족주의 단체들을 단속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다.

이후 선생은 한글의 역사적 연구에 매진해 1942년 '한글갈'을 1942년 출판한 뒤 어문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함께 검거돼 해방될 때까지 함흥감옥에서 보냈다.

해방 직후 선생은 일제통치로 방치됐던 국어를 되살리기 위해 조선어학회를 재건, '국어교과서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우리말로 된 국어교과서 편찬에 주력했다.

일본어만 써왔던 학생들에게 한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교원 양성을 위한 강습회도 이끌었다.

조선어 학회 기념사진 1946년ⓒ 뉴스1

1945년 9월 21일 선생은 미군정청 편수국장에 취임했다. 이때 군정청 안에 사회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 교과서편찬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교과서 편찬의 기본 방향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 9월 21일 퇴임때까지 3년 동안 선생은 '한글 첫걸음'을 비롯한 각종 교과서를 50가지 이상 펴냈다. 오늘날에는 익숙한 '짝수, 홀수, 덧셈, 뺄셈' 등의 용어들이 선생에 의해 교과서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다.

1946년에는 '한글가로글씨쓰기 연구회'를 만들어 한글 을 세로 대신 가로로 써야한다고 강력히 주장, 1947년'글자의 혁명'을 출판해 '한글 가로쓰기법 창안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또 이 해 10월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표준말을 지정해 만든 국어사전 '큰사전'을 편찬, 우리나라 고유언어가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다.

선생은 한글의 투쟁(1954), 나라사랑의 길(1958), 나라 건지는 교육(1963), 한글만 쓰기(1970) 등의 저서를 연이어 출판하는 등 국어 발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선생은 1970년 3월 23일 타계시까지 '한글전용촉진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글전용 실현을 위해 힘썼다.

syw0717@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