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의 영화읽기]마지막 4중주-삶은 계속된다
- 이상길 기자

(울산=뉴스1) 이상길 기자 = <마지막 4중주>에서 유명 첼리스트 피터(크리스토퍼 월켄)가 학생들에게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을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보통은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지만 이곡은 한 번에 7개의 악장으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각 악장들은 모두 연결돼 있어서 악장 사이에서 멈출 수가 없다. 쉴 수도 없고, 튜닝도 안 된다. 베토벤은 이 곡이 쉼 없이 연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이렇게 쉼 없이 오래 연주하면 각 악기들의 음률은 반드시 어긋나게 돼 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연주를 멈춰야 할까? 아니면 불협화음이 생겨도 필사적으로 서로에게 맞춰 가야만 할까? 난 잘 모르겠다. 같이 한번 알아보자."
영화처럼 인생도 가장 극적이고 행복한 순간에 그냥 막을 내리면 차라리 좋지 않을까.
어쩌면 현실에서 행복은 행복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 고통으로 바뀌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샘 멘데스 감독의 2008년작 <레볼루셔너리 로드>란 영화가 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1997년작 <타이타닉>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했던 두 주인공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로즈(케이트 윈슬렛)가 미국 중산층 부부로 등장한다.
그렇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만약 <타이타닉>에서 잭과 로즈가 함께 살아서 부부가 됐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물론 감독이 실제로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타이타닉>에서 잭과 로즈에게 우호적이었던 몰리(케시 베이츠) 아줌마까지 영화에 등장시킨 걸 보면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어 보인다.
어쨌든 <타이타닉>에서 잭이 죽지 않고 로즈와 결혼을 했다면 그들은 평생 행복했을까.
적어도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의 둘은 너무도 충격적이다. 둘 다 지루함에 몸부림치며 각자 바람까지 피다 결국 최악의 참극으로 끝을 맺는다.
아이러니하지만 <타이타닉>에서 잭과 로즈의 사랑이 아름다운 건 짧기 때문이었다.
악성 베토벤이 '현악 4중주 14번'을 지은 의도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죽지 않는 이상에야 참기 힘든 고통이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도 7개의 악장이 쉼 없이 이어지듯 삶은 계속된다.
현실은 분명 극적인 순간에 끝이 나는 영화와는 다르다. 계속돼야 하므로 오히려 잔인하다.
프랑스 시인 랭보의 삶을 다룬 <토탈 이클립스>란 영화에서 랭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이런 대사를 한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참지 못 할 일이 없다는 거야."
다만, <마지막 4중주>는 음악을 소재로 하는 만큼 피터의 가르침처럼 그들의 '불협화음'에 주목해야 한다.
<마지막 4중주>는 고상한 예술영화가 리얼리티를 제대로 부여하고자 할 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사실 음악영화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 삶에 대한 영화이고, 인간에 대한 영화다. 더불어 이미지와 실체에 대한 반전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시작되면 거대한 음악 홀에는 결성된 지 25년을 맞은 세계적인 현악 4중주단 '푸가'의 네 멤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어른이자 멤버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피터(크리스토퍼 월켄)를 비롯해 25년 전 푸가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다니엘(마크 이바니어)과 서로 부부관계인 로버트(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와 줄리엣(캐서린 키너)이 그들이다. 피터와 다니엘은 사제지간이다.
피터는 첼로, 다니엘은 제1바이올린, 로버트는 제2바이올린, 줄리엣은 비올라를 각각 연주한다.
그런데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시점은 돌연 과거로 돌아가고, '푸가' 멤버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물론 예술가들을 다루고 있는 만큼 그들의 삶은 처음엔 대단히 고상해 보인다.
하지만 정신적인 지주인 피터가 파킨슨병에 걸려 첼로 연주를 그만둬야 할 위기에 처하면서 그들의 잔인한 불협화음은 시작된다.
불협화음이라고 해봐야 결국은 '고통'을 의미한다.
그 고통은 그 동안 다니엘의 제1바이올린에 가려질 수밖에 없었던 로버트의 욕심에서 시작된다.
이후 그들의 불협화음은 도미노처럼 멤버 전체에 퍼진다. 하지만 <마지막 4중주>에서 진짜 중요한 건 그들이 불협화음을 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상한 예술가인 척 하지만 그들도 사실은 질투하고, 욕망에 쉽게 굴복하고, 끊임없이 쾌락을 좇아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
가령 로버트는 아내인 줄리엣을 진정 사랑하는 것 같지만 아내의 섭섭한 말 한마디에 다른 여자와 쉽게 잠자리를 가질 정도로 그 사랑은 허약했고, 과거 줄리엣을 좋아했던 다니엘은 로버트와 줄리엣의 어린 딸인 알렉산드라(이모겐 푸츠)의 구애 앞에 쉽게 무너지고 만다.
줄리엣의 영혼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그녀는 결혼해서도 자신을 키워준 피터와 옛 연인이었던 다니엘에게 연정을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가장 큰 충격은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피터. 마지막 장면의 충격적인 반전은 관객들로 하여금 엔딩 크레딧이 올라와도 한 동안 자리를 못 뜨게 만든다.
아무리 고상한 예술가라 해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삶이 막장이듯 현실에서도 삶은 막장이다.
하지만 그 때도 그들의 연주는 계속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티스트였던 고 백남준씨는 일찍이 "예술은 사기"라고 말했다.
잘은 몰라도 그가 그렇게 말한 데는 고상한 예술가의 삶과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삶 사이에서 벌어지는 간극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예술가는 고상한 척하기보다는 차라리 솔직할 때 더 빛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게 비단 예술 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될까.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은 우리들 인생을 담고 있다. 불협화음이 생겨도 연주를 멈출 수 없듯 삶도 계속돼야 한다.
고통 앞에서도 우리는 '그냥' 계속 살아간다. 그렇게 인생은 고달프지만 찬란하다.
7월25일 개봉. 러닝타임 105분.
lucas0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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