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적금 만기, 8년 뒤 내 집 마련"…오세훈표 장기전세 20년 성과 보니

평균 8.4년 머물며 빚 갚고 청약 준비…퇴거자 72% 자가로 이동
시세 절반 수준 보증금이 만든 여유…비워진 집은 다음 무주택자에게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아파트 단지 모습. 2026.5.29 ⓒ 뉴스1 오대일 기자

(서울=뉴스1) 신건웅 기자 = # 세 딸과 시어머니까지 여섯 식구가 함께 살던 심 모 씨 가족에게 2010년은 특별한 해였다. 서울 마포구의 전용면적 59㎡ 장기전세주택에 입주하면서 처음으로 오랫동안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집이 생겼다. 그 집에서 세 딸이 대학에 진학하고 취업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12년이 흐른 2022년, 심 씨는 정든 장기전세주택을 떠났다. 계약기간이 끝나서가 아니라 신축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기 때문이다. 그는 장기전세주택을 "가족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 소중한 디딤돌"이라고 회상했다.

심 씨 가족처럼 장기전세주택을 발판 삼아 내 집을 마련하고 떠난 사례는 적지 않다.

2022년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의 서울시 공공임대주택 입주자 패널조사에 따르면 장기전세주택의 평균 거주기간은 8.4년이었다. 최장 20년의 절반도 채우지 않은 셈이다. 퇴거자의 72%는 장기전세주택을 나온 뒤 자가로 이동한 것으로 조사됐다. 전체 공공임대주택 퇴거자의 자가 이주율 60%보다 12%포인트 높았다.

반지하 벗어나 처음 적금 만기…8년 뒤 '내 집'

세 자녀를 키우던 이 모 씨 가족도 장기전세주택이 기회가 됐다. 반지하 등을 전전하며 세 차례 이사하던 이 씨 가족은 2014년 중랑구 장기전세주택에 입주하면서 생활이 달라졌다. 결혼 후 처음으로 적금 만기를 경험했고, 이전에는 엄두를 내기 어려웠던 육아휴직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8년 동안 돈을 모아 결혼생활 15년 만에 자기 집을 마련했다. 장기전세주택은 이들에게 저렴한 전셋집 한 채를 넘어 가족이 다시 일어설 시간을 만들어준 공간이었다.

김모 씨 가족도 비슷했다. 두 딸을 키우던 김 씨 가족은 2011년 방 4개를 갖춘 40평대 장기전세주택에 입주했다. 안정적인 집이 생긴 뒤 예상하지 않았던 셋째 딸도 태어났고, 청약에도 당첨돼 이사했다.

한번 무너진 주거 사다리를 다시 올라간 가족도 있다. 남편의 사업 실패 등으로 어렵게 마련했던 아파트를 처분한 김모 씨 가족은 오랫동안 전세를 전전하다 2014년 마곡 장기전세주택에 입주했다. 9년 넘게 같은 집에 살면서 빚부터 갚았고, 돈을 모아 강동구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단칸방과 지하주택을 전전하다 2010년 집중호우로 살던 집까지 침수됐던 함 모 씨 가족은 2011년 세곡동 장기전세주택에 입주했다. 마찬가지로 보증금 대출을 하나씩 갚으며 내 집 마련을 준비한 끝에 입주 10년 차에 분양아파트 청약에 당첨됐다.

이들 가족에게 장기전세주택의 8~12년은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었다. 빚을 갚고 적금을 붓고, 아이를 키우고 청약을 준비하면서 다음 삶으로 나아간 시간이었다.

집에 덜 묶인 돈, 저축과 청약으로

이 같은 변화가 가능했던 가장 큰 배경은 주거비였다. 지난해 기준 장기전세주택 평균 보증금은 3억 4900만 원으로 당시 서울 아파트 평균 전셋값 6억 4800만 원의 약 54% 수준이다. 2007년 입주자는 현재 시세의 23% 수준인 보증금으로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시가 입주연도별 평균 보증금과 서울 아파트 평균 전셋값의 차이를 계산한 결과, 지난해 기준 입주자들이 덜 부담한 보증금 규모는 약 10조 원에 달했다.

집에 묶이는 돈이 줄어들자 대출을 갚고 적금을 붓고 청약을 준비할 여지가 생겼다. 집값과 전셋값이 오를 때마다 이사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면서 자녀의 학교와 부모의 직장 등 생활 기반도 지킬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장애가 있는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뒀던 백 모 씨 가족에게는 아이의 교육과 돌봄을 선택할 기회가 생겼다. 백 씨 가족은 특수학급과 장애아동 전담 돌봄시설이 있는 은평뉴타운에 살고 싶었지만, 높은 주거비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장기전세주택에 당첨되면서 아이는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의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고, 하교 후 집 앞 장애아동 전담 우리동네키움센터도 이용했다.

직장과 집도 가까워져 백씨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육아와 경제활동을 병행할 수 있었다. 시각장애가 있는 남편 역시 대중교통을 이용해 일상을 이어갔다.

아직 내 집을 마련한 사례는 아니다. 하지만 안정적인 집 한 채가 한 가족의 주거뿐 아니라 아이의 교육과 돌봄, 부모의 일자리까지 지켜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1일 서울 송파구 잠실르엘에서 신혼부부 장기전세주택 미리내집 현장 간담회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 2026.9.1 ⓒ 뉴스1 최지환 기자
20년 전 시작된 실험…성과와 한계 엇갈려

장기전세주택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첫 임기를 보내던 2007년 전국 최초로 도입했다. 당시 오 시장은 "아파트는 사는 것, 시프트는 사는 곳"이라며 주택을 소유가 아닌 거주의 관점에서 바라보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무주택 시민에게 시세보다 저렴한 집에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고, 그동안 자산을 모아 내 집 마련을 준비하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SH 패널조사에서는 장기전세주택 퇴거자의 72%가 자가로 이동한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시가 전체 퇴거 가구를 대상으로 별도 집계한 결과에서도 1171가구가 자기 집을 마련한 뒤 장기전세주택을 떠난 것으로 확인됐다.

첫 20년 만기…비워진 집은 다음 가족의 출발점

장기전세주택은 내년부터 처음으로 '20년 만기'를 맞는다. 2007년 입주한 초기 세대를 시작으로 2031년까지 모두 9361가구의 최장 거주기간이 순차적으로 끝난다.

일부 장기 거주자들은 서울 집값과 전셋값이 크게 오른 상황에서 새로운 거처를 구하기 어렵다며 계약 연장이나 분양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20년 가까이 한곳에서 살아온 가족이 다시 집을 구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작지 않다.

서울시는 만기를 앞둔 가구의 주거 이동을 지원할 방안을 살피면서도 '최장 20년 거주·분양전환 불가'라는 원칙은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일부 가구의 거주기간을 일괄적으로 늘리거나 분양 전환을 허용하면 같은 조건에 따라 이미 퇴거한 가구와 형평성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입주를 기다리는 다른 무주택 시민의 기회도 그만큼 늦어진다.

한 가족이 그 시간을 발판 삼아 주거 사다리를 한 계단 올라가면, 비워진 자리에서 또 다른 가족이 첫발을 내딛게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20년 전 서울 장기전세주택이 만들고자 했던 선순환 효과다.

명노준 서울시 주택실장은 "지난 20년간 장기전세주택은 주거 안정이 필요한 시민들이 삶의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도록 든든한 주거사다리 역할을 해왔다"며 "자가 마련 등으로 비워진 주택을 다음 무주택 가구와 미래세대에 다시 공급하는 선순환 구조를 지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keo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