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TSD 막으려 죽음과 마주한다…119 대원 해부실습 르포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예방 위해 서울대 의대서 해부교육
유병률 일반인의 5.5배…3명 중 1명 PTSD 호소
- 이재상 기자
(서울=뉴스1) 이재상 기자 = "실제 현장의 시신과는 조금 다를 겁니다. 약품 처리를 해서 더 차갑고 딱딱합니다. 익숙해져야 합니다. 한번씩 만져보세요." 해부실습교육을 맡은 교수의 말에 119 구급대원들이 하나둘씩 굳은 표정으로 카데바(의학 교육 및 연구 목적의 해부용 시신)에 손을 뻗었다.
굳이 의대를 찾지 않아도 어떤 공무원보다 시신을 자주 보기 마련인 구급대원들이 지난 17일 해부실습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서울대 의대에 모였다. 인체 구조에 대한 해부학적 이해도를 높이는 목적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119 대원들이 눈뜨고 보기 어려운 참혹한 현장에 노출된 뒤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조금이라도 예방하기 위해서다.
사고와 재난 현장을 누비는 대원들이니 이런 교육없이도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아무리 119 대원들이라도 이런 종류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질 리 없다. 그래서 충격에 미리 대비하는 실습교육이 마련됐다. '생명'을 구하기 일을 위해 우선 '죽음'부터 받아들여야 하는 119 대원들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죽음에 다가서기 위해 준비된 이날의 해부실습교육은 사자(死者)에 대한 감사로부터 시작했다. "먼저 아무 조건 없이 시신을 기증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함과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모두 고개를 숙였다.
실제 소방관들에게 PTSD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 소방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 따르면 소방관의 PTSD 유병률은 3.3%로 일반인(0.6%)의 5배 이상에 달한다.
2017년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소방관 21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일시적 우울증 등 PTSD를 호소한 소방관은 3명 중 1명꼴이었다. 소방관 한 명은 재직 중 평균 6.36건의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것으로 나왔다.
소방청은 PTSD 완화를 위해 심리전문가를 소방관서에 파견하는 '찾아가는 상담실'을 비롯해 심리안정프로그램, 정신건강 검사 등을 진행하고 있지만 그들의 고통을 완벽하게 지워내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현장에서 만났던 한 구급대원은 "고속도로 자동차 사고 현장에서 심하게 훼손된 시신을 본 뒤 계속 그 장면이 자꾸 떠올라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토로했다. 정신과 상담까지 받았지만 고속도로에 들어설 때마다 그날의 광경은 그의 머릿속에 파고들어 고통을 안겼다. "머리라도 식히면 나아질까 싶어 제주도에 휴가를 다녀왔는데 시간이 지난다고 완전히 잊혀지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지금도 고속도로 현장에 출동할라치면 마음 한 구석에서 두려움이 피어나요."
PTSD를 줄이기 위해 고민하던 소방청은 지난 2016년 부산소방학교에 이어 이번에 두 번째로 서울대 의대와 협력해 서울에서 해부실습을 마련했다. 전국에서 지원자를 받았고, 이날 31명의 소방 구급대원들이 서울을 찾았다.
2016년 입교한 김동효 소방사(26)는 "이론으로만 듣던 해부학 실습을 한다고 하니 기분이 묘하다"고 말했다.
현재 법적으로 의학교수나 의대생들을 제외한 이들의 해부 실습은 금지된다. 이에 따라 구급대원들은 교수와 조교들이 해부하는 모습을 참관하는 형식이다.
포르말린 냄새 가득한 해부실습실에서 카데바를 마주한 구급대원들은 상기된 표정 속으로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릎 십자인대가 어디인지 보여드릴게요. 피부를 벗기고 무릎 관절 안쪽에 보이는 것입니다. 운동하다가 많이 다치는 부위인데 그냥 봤을 땐 잘 안 보이고 무릎을 구부리면 뒤쪽에서 잘 보입니다."
뼈를 비롯해 심장, 폐, 허파 등 다양한 인체 부위가 차례로 눈앞에 펼쳐지자 구급대원들의 표정에는 진지함이 가득했다.
구급대원들은 "턱 관절이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심장 박동이 잘 되지 않을 때는 어떤 대처를 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등의 현장 대응용 질문을 던지면서 열성적으로 교육에 임했다. 당초 계획했던 교육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끝이 났다.
김동효 소방사는 "처음 목을 맨 사람을 봤을 때 사후경직상태 등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해부실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다음 현장에서는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조금 줄어들 것 같다"고 말했다.
백승일 소방사(26)는 "항상 현장에서 (시신을) 봤지만 이번 교육을 통해 죽음에 대해 다시 돌이켜보고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며 "막연하게 현장에서 접했던 죽음을 넘어 '살아있는 것의 반대말'이라는 철학적인 의미도 되새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교육에서는 해부실습 외에도 죽음에 대한 문화, 철학 강의 등도 진행됐다. 소방청 관계자는 "현장에서 시신을 대하는 구급대원들에게 해부학 실습은 꼭 필요한 교육과정"이라며 "내년에는 전국 9개 소방학교에서 신임 소방공무원과 구급대원들을 대상으로 확대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alexei@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