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 KTX 승자는 '묵호역'…MZ가 사랑한 '레트로 도시'
동해선 개통 후 승하차 인원 31만→42만 '급증'
철길·레트로 골목, MZ 감성 자극
- 윤왕근 기자
(동해=뉴스1) 윤왕근 기자 = 석탄과 오징어, 마도로스의 고동소리로 기억되던 항구 강원 동해시 묵호권역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 탄광 쇠퇴와 함께 한때 침묵하던 묵호권이 동해선 KTX 개통을 계기로 관광 시장의 '의외의 승자'로 떠오르고 있다. 변화는 숫자로 확인되고, 현장은 이미 체감하고 있다.
2월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달 28일 낮 12시쯤 KTX 묵호역. 열차가 도착하자 작은 대합실은 순식간에 북적였다. 캐리어를 끄는 연인과 배낭을 멘 친구들,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개찰구를 빠져나와 바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인 동쪽바다중앙시장은 이미 식도락객들로 가득했다. 장칼국수와 곰치국 식당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고, 골목에는 얼큰한 냄새가 퍼졌다. 인접한 해랑전망대 위로 셔터 소리가 이어졌고, 스카이워크 유리 바닥 위에서는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 모습이 연출됐다.
등대마을 논골담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알록달록한 벽화 앞에는 감성 사진을 남기려는 이들로 골목이 빼곡했다. 서울에서 온 30대 방문객은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 속 한 장면 같다"고 말했다.
묵호권 남쪽 하평해변 철길에서는 "가마쿠라 같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바다와 철로, 주택이 한 프레임에 담기는 장면이 온라인을 통해 확산되며 일본 애니메이션 슬램덩크 오프닝에 등장하는 가마쿠라 풍경과 닮았다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 소비는 묵호를 새로운 감성 공간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묵호(墨湖)는 바다와 물새가 먹빛처럼 검게 보였다 해 붙여졌다는 설이 전해진다. 1970~80년대 묵호는 강원 동해안 산업의 중심지였다. 삼척과 태백 탄광에서 생산된 석탄과 시멘트를 실은 화물선이 드나들었고, 오징어와 명태가 항구를 가득 메웠다. 유랑극단은 흥행을 위해 묵호를 반드시 들러야 했고, 작은 항구마을에 극장 3곳이 성업했다. 동해시는 한때 인구 10만 명을 넘겼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탄광이 사라지고 어획량이 줄면서 묵호의 전성기도 빠르게 식었다. 인구는 8만 6225명(2026년 1월 기준)까지 감소했다. 산업 의존 구조가 흔들리며 도시는 멈춘 듯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멈춤'이 지금의 경쟁력이 됐다. 전성기 시절 어업 가족들이 모여 살던 논골담길은 2010년대 도시재생을 거쳐 벽화마을로 변모했다. 단순한 포토존을 넘어 묵호의 흥망을 담은 생활사 공간이다. 이곳은 영화 봄날은 간다 촬영지로도 알려지며 세대를 넘는 감성 코드로 재해석됐다. "라면 먹을래요?"라는 대사가 태어난 등대마을 일대는 지금도 영화의 여운을 좇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변화는 통계로도 드러난다. 코레일 강원본부에 따르면 동해선 개통 전인 2024년 묵호역 연간 승하차 인원은 31만 5625명. 월평균 2만 6302명으로 여름에만 붐비는 '계절형 관광역' 구조였다.
그러나 2025년 승하차 인원은 42만 7206명으로 전년 대비 11만 명 이상 늘었다. 월평균 이용객은 3만 5600명 수준으로 약 35% 증가했다. 특히 2025년 8월에는 4만 3537명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월 4만 명 시대'를 열었다.
동해선 KTX가 본격 운행된 2026년 1월에는 한 달에만 5만 4322명이 묵호역을 이용했다. 2024년 월평균의 두 배를 웃도는 수치다. 비수기 개념이 옅어지며 사계절 관광지로 전환되는 흐름이 감지된다.
동해시에 따르면 설 연휴 기간 묵호권 주요 관광지 방문객은 2만 1046명으로 전년 대비 80.1% 증가했다.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는 165.8% 급증했다. 접근성 개선이 곧 방문 수요로 직결되고 있다는 의미다.
왜 MZ는 묵호역에서 내릴까. 열차는 사람을 데려다 놓았을 뿐이다. 머물게 한 것은 공간이 품은 이야기다. 논골담길에는 항구와 탄광의 기억이 겹겹이 쌓여 있고, 하평해변에는 바다와 철길이 만들어내는 한 장면의 힘이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확산된 바다 풍경과 체험형 시설은 감성 여행지 이미지를 굳혔다. 적산가옥과 노후 건물 위에 들어선 카페와 기프트숍은 ‘낡음의 미학’을 자극하며 레트로 감성을 강화한다. 열차에서 내려 도보로 바다와 시장, 골목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으로 작용한다.
MZ세대는 대규모 리조트보다 감성적이고 힙(hip)한 곳을 찾는다. 촬영하고 공유하며 재해석할 수 있는 공간을 선호한다. 묵호는 골목과 철길, 영화와 바다, 시장과 항구가 하나의 동선 안에서 이어진다. 공간 자체가 콘텐츠가 되는 구조다.
묵호의 반등은 거대 개발의 결과라기보다 감성의 재해석에 가깝다. 동해선 고속철도화 사업이 예타를 통과하면서 접근성은 더 개선될 전망이다.
임정규 동해시 문화관광국장은 "묵호권 관광콘텐츠의 체험성과 해안경관 매력이 SNS를 통해 확산하면서 방문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며 "KTX 접근성과 연계한 관광마케팅과 시설 관리 강화를 통해 체류형 관광도시 경쟁력을 높여가겠다"고 말했다.
wgjh6548@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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