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전쟁통도 아닌데 별일"…'드라이브 스루'로 물 받아 가는 강릉시민

스피드스케이트장 주차장 마련된 '드라이브 스루' 급수 현장
서명하고 트렁크 열면 직원이 '낑낑' 생수 묶음 넣어줘

극심한 가뭄으로 재난사태가 선포된 강원 강릉에 5일 전 시민을 대상으로 1인당 12L 분량의 생수가 배부된다. 이날 오전 강원 강릉시 포남동 강릉스피드스케이트장에 마련된 '드라이브 스루' 급수 현장. 2025.9.5/뉴스1 윤왕근 기자

(강릉=뉴스1) 윤왕근 기자 = "차를 이쪽으로 붙이세요." "어르신, 트렁크 열어주세요." "성함 적어주세요."

5일 오전 9시 30분, 강릉시 포남동 강릉스피드스케이트장 주차장 입구에 차량이 꼬리를 물었다. 출근길 정장을 입은 시민부터 경로우대 마크를 붙인 경차까지, 차종도 연령대도 다양하다. 차창 너머로는 긴장과 피곤이 묻어났다.

형광 조끼를 입은 차량 안내원이 팔을 흔들며 차량을 유도했다. 차가 멈추면 종이 서류가 건네진다. 이름과 주소, 가구원 수, 서명을 적는 짧은 절차. 곧이어 배부처로 이동하면 뒷좌석 문이나 트렁크가 덜컥 열린다.

문이 열리자 시청 직원들이 생수 상자를 들고 나타난다. 1인당 12L. 대략 2L짜리 생수 6개다. 한 가구 몫을 맞추려면 2~3 묶음은 기본이다.

차 안에 앉은 시민은 창밖으로 "고생 많으십니다" 한마디 건네고, 직원들은 무거운 상자를 차곡차곡 실어 넣는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지만, 불평은 없다.

교1동에서 온 김 모 씨는 "살다 살다 별일 다 겪는다. 전쟁통도 아니고 물을 다 받아 가네"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극심한 가뭄으로 재난사태가 선포된 강원 강릉에 5일 전 시민을 대상으로 1인당 12L 분량의 생수가 배부된다. 이날 오전 강원 강릉시 포남동 강릉스피드스케이트장에 마련된 '드라이브 스루' 급수 현장. 2025.9.5/뉴스1 윤왕근 기자

배부를 시작한 지 30분 남짓 지났을 뿐이지만, 이미 차량 30여 대가 다녀갔다.

현장엔 시청 행정국과 동사무소 남녀 직원 16명이 나와 물을 나눠주고 있었지만, 적지 않은 생수 묶음 무게 탓에 지쳐가는 모습이었다.

드라이브 스루를 빠져나온 한 50대 남성은 "출근길에 뉴스 보고 들렀다"며 "빨리 비가 와야지. 이게 무슨…" 하고 말끝을 흐렸다. 옆에 있던 중년 여성은 "물까지 받아 가야 할 정도라니, 전국 망신"이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최 모 씨(40대)는 "커피 받아 가는 것도 아니고 물을 드라이브 스루로 받는다"며 "이걸 재미있다고 해야 할지, 뭐라 표현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민은 "일단 수돗물은 나오지만 혹시 몰라 받아 간다"며 "오늘 받은 물을 만약을 대비해 비축해 놓을 것"이라고 했다.

극심한 가뭄으로 재난사태가 선포된 강원 강릉에 5일 전 시민을 대상으로 1인당 12L 분량의 생수가 배부된다. 이날 오전 강원 강릉시 포남동 강릉스피드스케이트장에 마련된 '드라이브 스루' 급수 현장. 2025.9.5/뉴스1 윤왕근 기자

지난달 30일을 기해 재난사태가 선포된 강릉은 이날 현재 도시 전역이 '급수장'이 됐다. 지난 3~4일 사천면·옥계면에 이어 이날부터는 중앙동, 교1·2동, 포남동, 초당동, 송정동, 내곡동, 강남동, 성덕동, 경포동 등 전역으로 생수 배부가 확대됐다. 현장은 주민센터, 체육시설, 공영주차장 등 시민 생활권 가까운 곳에 마련됐다.

아파트 단지에는 '택배'처럼 생수가 배송된다. 화물차와 지게차가 단지 앞에 멈춰 서면,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박스를 내려 나른다. 하루 254톤이 경포·홍제·교2동과 사천면 일대에 풀리고, 이어 교1동과 초당·송정·포남·강남·내곡동까지 총 865톤이 순차 공급된다. 취약계층에는 미리 전달된다.

강릉시가 전국에서 모은 생수는 219만 병. 시민 1인당 12L, 하루 2L씩 6일을 버틸 분량이다.

한편 강릉시는 이날 오전 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가뭄 대응 비상대책을 발표한다.

극심한 가뭄으로 재난사태가 선포된 강원 강릉에 5일 전 시민을 대상으로 1인당 12L 분량의 생수가 배부된다. 이날 오전 강원 강릉시 포남동 강릉스피드스케이트장에 마련된 '드라이브 스루' 급수 현장. 2025.9.5/뉴스1 윤왕근 기자

wgjh6548@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