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낙인 독립운동가 65년만에 무죄…손자 "숨죽인 세월 끝났다"

"승진 막히고 취업 좌절" 가족이 감내한 낙인의 시간
"환희보다 안도…탄압받은 독립운동가 명예 회복되길"

독립운동가 고 송병채 선생의 손자 송호준 씨의 모습.(송호준 씨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전주=뉴스1) 문채연 기자 =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6·10 만세운동'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3·1운동 10주년 기념 시위'를 준비했던 고(故) 송병채 선생(1909년생·1968년 사망). 독립운동가였던 고인은 '영세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내몰렸다. 법원으로부터 유죄(집행유예 형)까지 선고받았다.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르기까지 한 고인은 이후 남은 생을 간첩이라는 낙인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다행히 고인은 재심을 통해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게 됐다. 하지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지 무려 65년 만이었다.

재심 무죄 판결 소식을 접한 손자 송호준 씨(60)는 기쁨보다 가족이 감내해야 했던 시간을 먼저 떠올렸다.

송 씨는 "그때는 할아버지가 간첩으로 몰려 징역을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가족 모두가 불이익을 받던 시절이었다"며 "아버지는 승진길이 막혔고, 형제들도 번번이 취직에 실패했다. 혹여 손주들까지 피해를 볼까 봐 할머니도 할아버지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그가 할아버지의 존재를 실감한 건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됐을 때였다. 면회를 온 가족들이 하나같이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말을 하면서다. 당시 그는 그저 외모를 닮았다는 뜻으로만 여겼다.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된 건 1990년, 할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분의 후손이 찾아와 "독립운동가 포상을 함께 신청하자"고 제안하면서였다. 그제야 그는 할아버지의 과거를 처음 마주했다.

6·10 만세운동 당시 동맹휴학을 주도해 징역 6개월을 선고 받은 고 송병채 선생의 재판 기록 일부.(송호준 씨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송병채 선생의 독립운동은 1926년 전주고등보통학교에서 시작됐다. 순종 승하를 계기로 전국에서 6·10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일본인 교장 축출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이 일로 퇴학당하고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29년 상경 후에는 3·1운동 10주년 기념 시위를 준비하다 또다시 체포됐다. 징역 4년을 선고받았지만 실제로는 6년간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가에서 '간첩'으로 낙인찍힌 것은 1962년이었다. 익산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한 고등학교 시국강연회에서 '영세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기소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혁명재판소는 이를 반국가적 선동 행위로 판단했다.

고인은 이후 간첩이라는 낙인 속에 살다가 1968년 눈을 감았다.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유족들은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좌익 독립운동가'라는 이유에서였다.

송호준 씨는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관련 재판 기록을 엮으면 책 한 권이 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인정받지 못했다"며 "몇 년을 신청한 끝에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후, 사회적으로 '좌익 독립운동가'도 인정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2005년 겨우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지난해 4월에는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그리고 전주지법 군산지원 제1형사부(백상빈 부장판사)는 지난 19일 "북한 찬양·동조로 볼 증거 없다"면서 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무죄 선고로 송병채 선생은 65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송호준 씨는 "환희를 느끼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며 "기쁘기보다는 마땅히 바로잡혀야 할 일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할아버지의 무죄 판결을 시작으로 당시 정부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던 독립운동가들의 명예가 꼭 회복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tell42@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