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아래서 쉬어 가듯이"…제주 삼춘들의 아늑한 쉼터 '낭그늘'

[제주어 가게로 보는 제주 Ⅱ] ⑥ 낭그늘 요양원·노인복지센터
"인생의 종착역 오신 어르신들께 나무그늘 같은 집 되고파"

편집자주 ...유네스코 소멸 위기 언어인 제주어가 제주 골목상권의 새로운 브랜드로 숨 쉬고 있습니다. 뉴스1 제주본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12차례에 걸쳐 제주어 상호를 지닌 매장을 탐방하고, 해당 제주어의 언어적 가치와 그 속에 담긴 정겨운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번 기획기사가 다루는 제주어 상호들은 뉴스1 제주본부 제주어 선정위원회(허영선 시인, 김순자 전 제주학연구센터장, 배영환 제주대학교 인문대학장, 김미진 제주학연구센터 전문연구위원)의 심사를 거쳐 선정됐습니다.

제주 낭그늘 요양원·노인복지센터 간판.2026.9.30/뉴스1 ⓒ 뉴스1 오미란 기자

(제주=뉴스1) 오미란 기자 = '노약자 도움 직원 호출 벨'이 먼저 반기는 제주시 삼도1동의 한 작은 건물.

3층으로 걸어 올라가자, TV에서 흘러나오는 듯 흥겨운 노랫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간간이 나지막한 말소리와 웃음소리도 얹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퍽 낯익은 풍경이 눈에 담겼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너른 거실은 제주 마을 어귀 커다란 나무 아래 있던 너른 평상을 먼저 떠올리게 했다. "삼춘, 삼춘." 직원들이 손윗사람을 부르는 제주어로 어르신들과 친근하게 인사하는 모습도 더없이 정겨웠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던 9월의 마지막 날, '낭그늘 노인복지센터'의 풍경이다.

제주 낭그늘 요양원·노인복지센터 로고.2026.9.30/뉴스1 ⓒ 뉴스1 오미란 기자

사회복지사인 김길형(53)·양순영 씨(52) 부부는 2016년 제주시 일도1동에 '낭그늘 요양원', 2018년 제주시 삼도1동에 '낭그늘 노인복지센터'를 차례로 열었다. 다니던 복지시설이 문을 닫자 '예순 전에 작게라도 복지시설을 차리고 싶다'던 꿈을 일찍 실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던 이들이다.

의외로 가장 큰 고민거리는 이름이었다. 개원이 한 달도 채 안 남았는데 결정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김 씨는 "죽었다 깨도 이 일을 할 거라고 이야기하고 다닐 정도로 일에 대한 자부심이 큰데, 은퇴할 때까지 갖고 갈 곳의 이름을 허투루 짓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정말 컸다"고 돌아봤다.

그렇게 부부가 고심 끝에 간판에 올린 단어가 바로 제주어 '낭그늘'이다. '낭'은 나무를 뜻하는 제주어로, '낭그늘'은 '나무그늘'을 말한다.

제주 사람들에게 '낭그늘'은 사람을 품는 아늑한 공간으로 통한다. 제주 마을 곳곳에는 웅장한 자태의 오래된 팽나무가 많은데, 이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에서 아이들은 하염없이 뛰어놀며, 어른들은 땀을 식히거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살았다. 농촌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산다.

김 씨는 "이름을 놓고 아내와 한창 싸울 때였다. 엄청 덥던 8월이었는데,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주변에 그늘막이 없어서 아무 그늘로 가서 종종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여보, 저거야!'라고 했었다"고 웃으며 "인생의 종착역에 오신 분들에게 '낭그늘'이 되어 드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이름 짓게 됐다"고 했다.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의 한 팽나무.(제주학연구센터 누리집 갈무리, 재판매 및 DB 금지)

부부는 제주의 옛 정서에 기반한 친숙함을 내세워 요양원이나 노인복지센터가 낯설 이용자들의 마음을 여는 데 무엇보다 신경 쓴다고 했다.

이름을 '나무그늘'이 아니라 제주어인 '낭그늘'로 지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뿐 아니라 방 이름도 '폭낭(팽나무의 제주어)', '구럼비낭(까마귀쪽나무의 제주어)', '소낭(소나무의 제주어)'으로 짓고, 직원들에게는 제주어 사용도 매우 적극적으로 독려한다고. 식사 역시 호박잎국, 보리밥, 된장국 등 어르신들이 편안하게 드실 수 있는 제주 제철·향토 음식으로 주로 준비한다고 한다.

수년간 이용자 수를 10명 안팎으로 유지하고 있는 점도 그 노력의 일환이다. 김 씨는 최대 수용인원을 '20명'이라고 못 박았다. 그는 "수용인원이 많아지면 금전적인 상황은 좋아지겠지만, 포기해야 하는 부분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면서 "관리만 할 생각이었다면 진작 간판을 뗐다"고 했다.

요즘 김 씨는 이사 준비로 여념이 없다. 조만간 낭그늘 노인복지센터가 낭그늘 요양원이 있는 건물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어서다. 그는 당장 이 일을 잘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 남은 바람이 있다면 제주 곳곳에 아기자기한 '낭그늘'을 더 만들고 싶다고.

김 씨는 "어르신들에게 최고의 요양원은 바로 집이다. 그렇다면 제 역할은 그 집과 가장 비슷한 공간을 만드는 법을 연구해 나가는 것뿐"이라며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고, 함께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고 미소 지었다.

※이 기사는 뉴스1 제주본부와 제주도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mro1225@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