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움의 땅을 기회의 땅으로…마을 일구는 제주 '웃드르' 사람들

[제주어 가게로 보는 제주] ⑨ 웃뜨르밥상
중산간 일컫는 제주어…이젠 '농촌다움' 상징으로

편집자주 ...뉴스1은 도내 상점 간판과 상호를 통해 제주어의 의미를 짚어보고, 제주어의 가치와 제주문화의 정체성을 재조명하는 기획을 매주 1회 12차례 보도한다. 이번 기획기사와 기사에 쓰인 제주어 상호는 뉴스1 제주본부 제주어 선정위원(허영선 시인, 김순자 전 제주학연구센터장, 배영환 제주대학교 국어문화원장, 김미진 제주학연구센터 전문연구위원)들의 심사를 받았다.

제주시 한경면 산양리에 있는 백반집 '웃뜨르밥상'.2025.9.20./뉴스1

(제주=뉴스1) 오미란 기자 = '자연과 예술이 숨 쉬는 마을 산양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라산 정상보다는 낮고, 바닷가보다는 높은 제주 중산간 서쪽에는 제주시 한경면 산양리라는 곳이 있다. 제주에만 있는 원시림인 곶자왈 '산양큰엉곶'이 마을 중심에 있고, 폐교를 리모델링해 만든 복합창작공간 '예술곶산양'과 동백나무 군락지, 감귤밭이 곳곳에 있는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을을 찾아온 이들을 환영하는 큰 벽화가 그려진 집이 나오는데, 바로 주민들의 사랑방 '웃뜨르밥상'이다.

이주민인 김명근 대표(52)가 운영하는 이곳은 주 손님이 마을 주민들인 백반 전문점이다. 2023년 7월, 지인이 운영하던 유명 식당 '웃뜨르우리돼지'를 넘겨받아 같은 자리에 '웃뜨르닭'이라는 이름으로 식당을 낸 뒤 지난 1월 지금의 '웃뜨르밥상'으로 상호를 바꿨다고 한다.

김 대표는 '웃뜨르'라는 단어만큼은 지키고 싶었다고 했다.

2009년 '웃뜨르우리돼지'가 문을 연 이래로 16년째 한 자리를 지키며 마을에서 유일하게 '웃뜨르'라는 이름으로 손님들을 맞고 있어서다. 무엇보다 그는 2011년 아내의 고향인 이곳 산양리로 이주한 뒤 청년회 등에서 활동하며 마을을 상징하는 이 제주어에 애정이 깊어졌다고 했다.

제주시 한경면 산양리 전경.(산양리마을 홈페이지 갈무리)

사실 '웃뜨르'는 제주어 '웃드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웃드르'는 위를 뜻하는 제주어 '우'과 들을 뜻하는 제주어 '드르'가 합쳐진 복합어로, 위쪽 들녘을 뜻한다. 주로 중산간 마을을 일컬을 때 쓰인다. 곳에 따라 '웃드리'라고도 한다.

30~40년 전만 해도 제주에는 '웃드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다. 얼마나 심했는지 <개정·증보 제주어사전(제주특별자치도·2009년)>과 <제주어 기초어휘 활용 사전(강영봉·김순자·2021년)> 등에 웃드르 주민들을 낮잡아 불렀던 '웃드릇것', '웃드릇놈'이라는 단어가 풀이돼 있을 정도다.

예로부터 '웃드르'는 화산섬인 제주에서도 특히 물이 귀하고 땅이 척박해 삶이 무척이나 고단한 곳이었다. 설상가상 1940년대 후반 4·3 발발 당시 주민들을 바닷가로 강제 이주시키는 '소개령'과 온 마을을 불태워 없애려는 '초토화 작전'이 이뤄진 곳 역시 안타깝게도 '웃드르'였다.

이처럼 설움의 땅이었던 '웃드르'가 지역사회에서 긍정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2008년부터다. 산양리를 비롯해 저지리, 청수리, 낙천리 등 한경면 4개 마을 주민들이 농림수산식품부 공모사업인 '웃뜨르권역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에 팔을 걷어붙였던 때다.

마을 만들기 사례집 <제주의 마을을 품다(제주특별자치도·2012년)> 등에 따르면 권역명은 당초 저지리와 청수리의 첫 글자를 딴 '저청'이었는데 주민들은 4개 마을을 잘 아울러 보자는 뜻에서 '웃뜨르'라고 정했다. '웃드르'에서의 삶을 설움이라 생각했던 일부 주민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추진위원회는 도리어 '웃드르'의 가능성을 포착하고 키워 나가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사업은 5년 뒤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웃뜨르빛센터·승마학교 조성 등의 성과로 중간평가에서 최우수 권역으로 선정되는가 하면, 사업의 일환이었던 '웃뜨르문화축제' 역시 다양한 농촌체험과 문화행사로 해마다 3000여 명을 끌어모으면서 전국 우수 농어촌 마을축제로 선정됐다.

이제 '웃드르'는 제주에서 농촌다움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자리 잡는 모양새다. 산양리 옆 낙천리에는 식당인 '웃뜨르 항아리'가 성업 중이고, 제주시 한림읍에는 펜션인 '웃뜨르협재312', 제주시 조천읍 중산간에는 '웃뜨르펜션'과 '웃뜨르농장' 등이 들어서 있다.

그간 마을의 성장을 지켜보며 때로는 힘을 보태기도 했던 김 대표는 "서울 사람이었던 제가 웃드르 사람이 다 됐다"며 웃었다. 그는 "식당 일이 쉽지는 않지만 미래가 기대되기도 한다"고 했다. 한경면은 지난해 인구 1만 명 시대를 열었다.

김 대표는 "웃뜨르밥상이라는 이름에 많은 주민분들이 친숙감을 느끼시는지 좋아해 주신다"며 "새로운 도전, 저도 한 번 웃드르에서 잘 해보겠다"고 힘줘 말했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mro1225@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