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뛸락·곱을락·줄ᄃᆞᆼ길락, 오징어게임 속 놀이 제주어로는?

[제주어 가게로 보는 제주] ⑦ 애월 고불락
'숨다'는 의미 '곱다'서 파생…'곤밥'의 추억 쏠쏠

편집자주 ...뉴스1은 도내 상점 간판과 상호를 통해 제주어의 의미를 짚어보고, 제주어의 가치와 제주문화의 정체성을 재조명하는 기획을 매주 1회 12차례 보도한다. 이번 기획기사와 기사에 쓰인 제주어 상호는 뉴스1 제주본부 제주어 선정위원(허영선 시인, 김순자 전 제주학연구센터장, 배영환 제주대학교 국어문화원장, 김미진 제주학연구센터 전문연구위원)들의 심사를 받았다.

애월 고불락(애월 고불락 블로그 갈무리. 재판매 및 DB금지)/뉴스1

(제주=뉴스1) 고동명 기자 = "꼭꼭 곱으라. 머리꺼럭 보염쩌.(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해안도로에서 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애월 고불락'이라고 쓰인 소박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고불락'은 제주어로 숨바꼭질이라는 뜻의 '곱을락'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박상희 애월 고불락 대표는 "우리 식당은 대로변이 아니라 골목 안쪽까지 들어와야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며 "제주의 올렛길처럼 골목에 숨어 있다는 의미에서 고불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곱을락'은 지역에 따라 '곱옴제기, 곱을내기, 곱음제기' 등으로 불린다. '애월 고불락'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넘어,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살아온 제주의 정서를 밥상 위로 불러낸 상호다.

지금은 올렛길 하면 걷기 코스로 알려졌지만 올레는 '큰길에서 집까지 이어지는 좁은 길'을 뜻하는 '오래'의 제주어다. 제주 시골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로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굽이진 돌담길이 바로 '올레'다.

제주어에는 '곱을락'처럼 용언의 어간에 접미사 '-을락' 또는 '-ㄹ락'을 붙인 단어들이 많은데 주로 놀이나 행위와 관련된 어휘를 만들어낸다.

애월 고불락(애월 고불락 블로그 갈무리. 재판매 및 DB금지)/뉴스1

베뛸락(줄넘기), 공찰락(공차기), ᄃᆞᆯ을락(달리기), 줄 길락(줄다리기) 등이 그렇다. 모두 두 사람 이상이 하는 공동체 놀이라는 특징이 있다.

'곱을락'은 '곱다(숨다)'라는 제주어에서 파생했다. '곱지다'는 '숨기다'라는 뜻이 된다.

'곱은 맛집', '곱아진 맛집'이라고 하면 관광객들이 여행할 때마다 한 번씩은 검색해 보는 '숨은 맛집', '숨겨진 맛집'이라는 의미다.

'애월 고불락'은 그 이름처럼 제주의 '곱은 맛집'인 셈이다. 가정식 백반을 판매하는 식당으로 제육볶음이나 고등어를 상추에 싸서 강된장을 얹어 먹는 상추쌈밥이 인기메뉴다.

100년이 넘은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식당 외관부터 예사롭지 않다. 아이들이 돌담 사이를 뛰어다니며 숨고 찾던 장면이 저절로 그려진다. 손님들이 가게 벽면에 빼곡하게 써놓은 낙서에서는 이 식당의 세월과 고객들의 애정이 느껴진다. 빽빽한 낙서벽에서 몇 년 전 내가 써놓았던 '곱앙 잇던' 낙서를 찾는 재미도 있다.

쏟아지는 잠 이기고 맛보던 '곤밥'의 추억

박 대표는 음식에서 어릴 적 먹었던 '곤밥'의 정서를 녹여내고 싶었다고 한다.

제주어 '곤밥'은 흰쌀밥이다. 흰쌀밥은 지금이야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고 요즘은 건강을 위해 '곤밥'보다 잡곡밥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지만 논이 거의 없는 제주에서의 '곤밥'은 제사나 잔칫상에나 오르는 귀한 음식이었다.

박 대표는 "과거에는 자정이 넘어 파제를 해야 곤밥을 비롯한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있었는데 그 귀한 밥을 먹으려고 아이들이 잠도 안 자고 기다리곤 했다"며 "그런 곤밥처럼 귀한 음식을 손님들에게 대접하고 싶었다"고 했다.

제주는 화산회토여서 볍쌀이 귀했다. 벼농사는 한경면 고산리, 서귀포 강정동 등 일부지역에서만 지었고 다른 지역에서는 보리밥이나 조밥을 주로 상에 올렸다.

지금은 제주에서 관광객들이 별미로 먹는 '파래밥', '톳밥'과 같은 해조류를 넣어 만든 밥도 쌀이 부족한 도민들이 궁핍했던 시절 지어 먹었던 구황음식이었다.

곤밥은 '곱다'에서 유래했다. '곱을락'의 '곱다'와는 발음이 같지만 뜻이 다른 동음이의어다. 곤밥은 흰밥의 빛깔이 잡곡밥보다 고와서 붙여졌다.

제주 4·3을 전국적으로 알린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삼촌에도 '곤밥'과 관련한 구절이 나온다.

"곤밥은 고운 밥에서 왔을 것이고 쌀밥은 빛깔이 고우니까. 어린 시절에도 파제 후 곤밥을 몇 숟갈 얻어먹어 보려고 길수 형과 나는 어른들 등 뒤에서 이렇게 모로 누워 새우잠을 자곤 했다"라는 구절이다.

과거 제주에는 제사가 끝나면 곤밥과 제사 음식을 동네 노인들에게 나누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곤밥'은 특별한 날에나 맛볼 수 있는 사치이자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나눔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방언학자인 김순자 박사(전 제주학연구센터장)는 "'고불락'에서 유년시절의 숨바꼭질인 '곱을락'과 '곤밥'을 소환해 제주 사람들의 옛 삶을 다층적으로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제주어 상호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인 언어의 묘미와 강력한 힘도 느낄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kd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