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기다린 '첫 여성 소방정'… 허선경 "소방관이란 담요 같은 사람"
경기소방 첫 내부 승진 여성 소방정… 추미애 취임 후 '유리천장' 깬 상징적 인사
편견 대신 실력, 담요 한 장으로 일깨운 '소방 가치'…"'최초'보다 따뜻한 리더로"
- 김기현 기자
(수원=뉴스1) 김기현 기자
소방관이란 제게 담요 한 장입니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 34년 역사상 처음으로 내부 승진한 여성 소방정이 된 허선경 119종합상황실 상황관리담당관은 15일 뉴스1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소방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뜻밖의 답을 내놨다.
화염을 뚫고 사람을 구한 극적인 구조도, 생사를 오가는 긴박한 재난 현장도 아니었다. 그가 가장 오래 품고 있는 기억은 화재 현장에서 구조된 시민의 어깨 위에 담요 한 장을 덮어주던 순간이었다.
"그때는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담요를 덮어드리자 그분이 연신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그 순간 알았습니다. 소방은 불을 끄는 일만이 아니라 가장 두렵고 추운 순간 누군가를 안심시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허 소방정은 그 마음으로 20여 년을 걸어왔다. 그리고 지난 13일, 경기도소방재난본부 출범 이후 34년 동안 누구도 밟지 못했던 자리에 섰다. 경기도가 그를 '소방정'으로 승진 임명하면서다.
소방정은 일선 소방서장을 맡는 고위 간부 계급으로 도내 49명뿐이다. 현재 경기소방 공무원 1만1498명 가운데 여성은 약 1700명(15%)이지만, 내부 승진으로 소방정에 오른 여성은 허 소방정이 처음이다.
첫 여성 광역자치단체장인 추미애 경기도지사 취임 직후 이뤄진 이번 인사는 단순한 승진을 넘어 남성 중심으로 인식돼 온 소방 조직의 유리천장을 깬 상징적인 인사로 평가받는다.
추 지사는 임명장을 수여하며 "이번 승진은 성별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현장에서 묵묵히 쌓아온 전문성과 책임감, 도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헌신이 만든 정당한 결과"라며 "후배 소방관들에게 희망과 도전의 이정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허 소방정은 승진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보다 '책임감'이 먼저 떠올랐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정말인가' 싶었다"며 "곧 소방정이라는 계급의 무게가 먼저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어 "이 자리는 제 혼자 힘으로 온 것이 아니다"며 "함께 현장을 지키고 조직을 만들어온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허 소방정의 20여 년 소방 인생은 화려한 기록보다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며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이었다.
지금은 '첫 여성 소방정'이라는 기록을 남겼지만, 한때 그는 현장에 서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 소방관이 재난 현장에서 남성 대원들을 이끄는 모습이 낯설던 시절, 그는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현장지휘단장을 맡은 여성 간부였다.
하지만 그 자리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허 소방정은 서장을 찾아가 현장지휘단 근무를 자원했으나 두 차례 거절당했다.
직접적으로 "여성이어서 안 된다"는 말을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성 지휘관에 대한 조직의 우려는 분명 존재했다.
허 소방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현장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소방관이 될 수 없다'는 신념에 또 다시 서장실 문을 두드렸고, 결국 기회를 얻었다.
어렵게 거머쥔 기회는 오히려 그를 더 치열하게 만들었다.
'현장에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언제든 물러나야 한다'는 각오로 누구보다 먼저 현장으로 달려갔고, 재난 유형별 대응 전술을 스스로 익혔다.
정기 훈련 때마다 직접 시나리오를 작성하며 반복해 연습했다. 작은 훈련 하나도 실제 재난처럼 준비했다.
그렇게 2년 6개월. 경기도 최초 여성 현장지휘단장은 결국 '여성 지휘관'이 아니라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지휘관'으로 인정받았다.
허 소방정은 "실력과 전문성으로 증명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며 "배움은 여성이라는 편견을 뛰어넘는 가장 큰 무기이자 저를 지켜주는 방화복이었다"고 돌아봤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진학해 공무원 인사제도와 조직 운영까지 공부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현장뿐 아니라 조직을 이해해야 더 나은 소방 조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허 소방정이 지금도 과거를 회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순간은 의외로 '거대한 재난'이 아니다. 주택 화재 현장에서 구조된 시민에게 '담요를 덮어주던 때'였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보조 업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담요를 건네받은 여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연신 "고맙다"고 말한 순간부턴 허 소방정 소방 철학이 확 바뀌었다.
그는 "추위 속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는데, 담요 한 장이 큰 위로가 됐다고 하더라"며 "재난 현장에서 시민들이 기억하는 것은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자신을 안심시켜 준 사람의 따뜻한 마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허 소방정은 지금도 "도민의 생명을 지키는 소방관은 결국 추위에 떠는 시민에게 담요를 덮어줄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아직까지 그를 괴롭히는 아픈 기억도 있다. 극단적 선택 신고로 출동했던 날이었다.
당시 허 소방정은 혹시라도 신고자가 마음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이렌과 경광등을 끄고 조심스럽게 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현장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상황실로부터 이미 늦었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현장을 수습하고 돌아오는 길, 그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기동화를 신는 시간을 1초만 줄였다면."
누구도 그의 책임이라고 탓하지는 않았지만, 허 소방정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게 한 존재는 바로 동료들이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며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힘을 얻었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토지'와 '태백산맥'을 읽었다. 절망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나려 노력했다.
무엇보다 허 소방정이 20여 년 동안 각종 사건·사고 현장을 꿋꿋하게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가족이었다.
교대근무와 비상근무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지만 남편은 늘 "당신은 경기도를 지켜라. 가정은 내가 지킨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는 허 소방정이 현장으로 향하는 가장 큰 힘이 됐다. 초등학생이 된 두 아이는 이제 엄마를 자랑스러운 소방관으로 소개한다.
허 소방정은 "순천에 계시는 어머니는 승진 소식을 듣고 목이 메었다"며 "10년 전 돌아가진 아버지도 이 소식을 들으면 참 기뻐하셨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현재 그는 119종합상황실 상황관리담당관으로 근무하며 1400만 경기도민 신고를 가장 먼저 접하는 상황실을 총괄하고 있다.
119종합상황실은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매일 수천 건에 이르는 신고 속에서 생명과 직결되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또 다른 재난 현장'이다.
그는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를 묻자 "도민이 가장 위급한 순간 가장 먼저 신뢰할 수 있는 상황실을 만드는 것"이라고 답했다.
후배 여성 소방관들에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이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한계 속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서면 된다. 이미 여러분은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응원의 말을 덧붙였다.
특히 허 소방정은 자신을 '경기소방 첫 여성 소방정'으로 기억하지 말아달라고 누차 피력했다.
오히려 "언제든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선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함께 답을 찾는 리더로 남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34년 만에 경기소방의 첫 여성 소방정이라는 기록은 역사에 남을 전망이다. 그러나 허 소방정이 끝내 남기고 싶은 것은 '최초'라는 기록이 아니었다.
누군가 가장 두렵고 힘든 순간,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마음을 덮어주는 사람. 그가 말한 '담요 한 장'은 한 장의 천이 아니라, 2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지켜온 소방관의 마음이었다.
kk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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