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가제에 묶이고, 브로커에 떠밀리고…사각지대 놓인 외국인 노동자 권리
사업장 변경 제한과 관리 부실, 계절근로자 집단 이탈…제도 전면 개편 절실
- 박지현 기자
(광주=뉴스1) 박지현 기자 = 전남 지역에서 잇따른 외국인 노동자 인권 유린과 집단 이탈 사건은 한국 이주노동 정책의 구조적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노동단체는 사업장 이동 제한과 체류 기간 압박, 브로커의 착취가 맞물리면서 합법 체류마저 노동자 권리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고용허가제(E-9)는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을 엄격히 제한한다. 임금체불, 폭언, 괴롭힘 등 정당한 이직 사유가 있어도 이를 입증해 고용센터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증명 과정은 까다롭고 행정 절차는 복잡해 피해자 상당수는 '침묵'을 선택한다.
지난 2월 전남 영암 돼지농장에서는 상습적인 폭언·폭행에 시달리던 네팔 출신 청년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일어났다.
같은 달 전남 나주 벽돌공장에서는 스리랑카 노동자 B 씨(31)가 지게차에 묶여 조롱당하는 인권 유린 사례가 발생했다.
B 씨는 6개월간 괴롭힘을 견디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사업장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해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알려진 뒤 보호시설로 옮겨졌고 고용노동부는 조사에 착수했다.
손상용 전남이주노동자네트워크 사무국장은 "고용허가제는 사업주의 고용권만 보장하고 노동자의 선택권은 사실상 봉쇄하는 제도"라며 "이주노동자에게 이동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유사한 인권 침해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농번기 단기간 인력 수급을 위해 운영되는 계절근로자 제도(E-8)에서도 허점은 반복된다.
지난 7월 2일 전남 장성에서는 입국 2개월 만에 태국인 계절근로자 14명이 집단 무단 이탈했다. 39명 중 40% 가까이 농장을 떠난 것이다. 지난해에는 고흥에서 100여 명의 집단 이탈 사례가 있었다.
무단 이탈 노동자 상당수는 더 높은 임금을 좇아 도시 공장이나 건설 현장 등으로 이동한다. 임금에서 브로커 수수료를 떼이지 않고 더 많은 수입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절근로자의 체류 기간은 3~5개월로 짧다. 출국 전 이미 높은 알선비와 수수료를 부담한 상황에서 생계비를 마련하려다 보니 불법 체류의 유혹이 커진다.
노동단체의 설명에 따르면 중간에 개입하는 브로커는 입출국 서류, 사업장 알선, 통역 명목으로 임금의 절반 가까이 착취하고 있다.
하지만 지자체와 공공기관의 체계적인 관리 감독은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다. 노동자 선발·입국 주관 시스템은 있지만 입국 후 실태 점검이나 이탈 방지 등 중간 관리 기능이 부재하면서다.
손 사무국장은 "계절근로자 확대에만 급급할 뿐 인권 보호나 중간착취 차단 대책은 여전히 부실하다"며 "공공기관이 고용, 숙소, 노무 관리를 직접 책임지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 단체들은 "고용허가제가 사실상 '종속계약'으로 작동하고 있다며 사업장 변경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고 있다.
전남도는 31일 '외국인 근로자 인권보호 후속 대책'을 발표하고 피해자 보호와 재발 방지를 위한 7가지 과제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광주전남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는 지난 1일 발표한 공동 논평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장 변경의 자유 보장'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고 지적했다.
단체는 "전남도의 대책은 사전 예방이 아닌 사후 대처에 가까운 늦은 발표"라며 "대책 발표 이전에 피해자의 폭로와 영상 공개가 있어야만 정책이 나오는 현실도 바뀌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정부는 현재 '고용허가제 개선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인권 단체들은 "제도 근간이 바뀌지 않는다면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사업장 변경의 자유와 독립적인 피해 구제 기구 도입 등을 촉구한다.
문길주 전남노동권익센터장은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에게 선택권을 박탈하는 구조"라며 "사업장 변경을 당연한 권리로 보장해야 반복되는 폭력과 인권침해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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