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광주' 유린한 계엄군…이번엔 왜 힘을 못 썼나?
국회의원과 시민들이 '라이브 정보전' 통해 선제적 대응
- 이수민 기자
(광주=뉴스1) 이수민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가 6시간 만에 막을 내린 가운데 '실패한 내란'의 뒷배경에는 80년 5·18민주화운동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지난 3일 오후 10시 25분 대국민 특별담화를 통해 대국민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자정을 약 1시간 30분 남겨둔 늦은 시각 비상계엄 선포로 국민들은 혼란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시민들과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권 의원들의 적극적인 대응 속에 긴박했던 계엄의 밤은 일단락됐다.
갑작스러운 계엄 선포는 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45년 만에 처음이다. 80년 5월에는 비상계엄 확대 하루 전인 17일 예비 검속을 통해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잡아들였다. 하지만 이번에 '예비 검속'은 없었다.
민주당은 계엄 선포 약 12분 만인 오후 10시 40분 국회 긴급 소집을 요청했다. 이재명 당 대표도 SNS로 실시간 상황을 중계하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국회의원과 보좌진을 비롯해 일반 시민들도 속속 국회 앞으로 도착했다.
국회 진입로는 경찰이 가로막았으나 야당 의원들은 국회 담을 넘어서 내부로 진입했다.
4일 0시 27분쯤 계엄군이 국회 본청 정문으로 진입을 시도하자 야당 의원과 보좌진, 시민들은 몸싸움을 벌이며 막아냈다.
국회에 들어선 의원들은 계엄 선포 대응 본회의를 열어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을 상정하고 '계엄해제 결의안'을 가결했다.
80년 5월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광주시민들도 계엄군에 맞섰으나 잔인한 유혈 진압으로 물러서야 했다.
이번에는 계엄군도 무력진압을 할 수는 없었다. 2024년에 '계엄 선포'라는 '정신 나간 명령'에 젊은 군인들은 동요했고 지휘도 혼선을 빚었다.
계엄을 막은 가장 큰 무기는 '정보'였다. 80년에는 정보 수단이던 신문과 TV·라디오 등 언론만 통제하고 검열하면 됐다. 당시 실제로 광주의 고립과 피해 사실을 외부에선 알지 못했고 오히려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등 왜곡설을 만들어 국민을 속였다.
이번에도 80년 5월과 똑같이 계엄포고령을 통해 정치 활동과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언론·출판을 통제하려 했으나 막지 못했다.
언론사는 실시간으로 기사를 송출하고 일반 시민들도 SNS와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전국의 상황을 공유했다.
계엄 선포에 대항한 세력이 80년 5월엔 '20대 대학생'이었으나 이번엔 전국민으로 확대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80년 5월 수도권 주요대학의 '서울역 회군' 이후 전남대를 비롯한 광주전남 대학생이 중심이 됐으나 이번 '서울의 밤'에는 본무대가 국회였고 시민들이 막아서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젊은날 5·18민주화운동을 겪은 50·60·70세대의 경험치와 교과서에서 잘못된 지도자의 판단이 시대를 어떻게 망가뜨렸나를 배운 10·20·30·40세대의 판단력이 합쳐지면서 '조기 종식'이 가능했다는 평가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대한민국은 성숙한 민주시민의 나라”라며 “80년 5월엔 목숨을 걸고 전두환 군부 쿠데타에 맞섰고, 박근혜 정권 당시엔 촛불을 들어 대통령 탄핵을 이끌었던 민주시민들이 지난밤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또 한 번 ‘쿠데타 시도’를 막아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힘"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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