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40주년을 말하다]⑦ 항쟁 5일째 '해방 광주'…빛나는 시민공동체

수습대책위 구성과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질서 회복
무기 회수 두고 수습파와 항쟁파 대립…새 지도부 탄생

편집자주 ...1980년 5월 한반도 서남권의 중심도시인 광주에서는 한국 현대사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5·18 40주년을 맞아 5·18기념재단이 발간한 '5·18 열흘 간의 항쟁' 등의 자료 등을 토대로 40년 전 비극의 원인과 진행과정, 남은 과제는 무엇인지 되짚어본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의 모습.(5.18민주화운동기록관 상영 영상 갈무리) /뉴스1 ⓒ News1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 항쟁 5일째인 1980년 5월22일, 광주는 오랜만에 평온을 되찾았다. 계엄군은 물러나고 시민군이 도청에 입성했다. 시민들은 믿기지 않은 현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계엄군을 몰아냈다는 승리의 쾌감을 만끽했으나 한편으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려움과 스산함도 얼굴에 흠뻑 배어 있었다.

시민들은 길거리에 흩어져 있던 부서진 차량의 잔해와 핏자국을 치우고 시내를 깨끗이 청소했다.

오전 6시30분경, 광주공원에는 시민군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시민군은 재편성 작업을 진행했다.

시민군 차량 78대에 일련 번호를 부여하고 차량별로 의료, 연락, 보급, 수송, 지휘·통제, 순찰, 전투 등의 임무를 부여했다.

도청으로 이동해 어수선한 구내를 정돈한 다음 도청을 본부로 정하고 1층 서무과를 작전 상황실로 사용했다.

오전 9시, 도청광장 분수대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속속 모여 앉았다. 시민들에겐 16절 갱지 양면에 프린트한 '투사회보' 2호가 배포됐다.

회보에는 전날 상황이 적혀 있었다. 내용은 약간 과장된 부분은 있었지만 비교적 정확했다. 투사회보를 받아든 시민들은 프린트가 잘못돼 글씨가 희미한데도 열심히 읽었다. 뉴스에 대한 갈증이 얼마나 심한가를 그대로 보여줬다.

오전 10시30분경 군용 헬기가 도청 상공을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 즉시 자수하라. 자수하면 생명을 보호받는다'는 방송을 했다. 계엄사령관 명의로 된 경고문이 적힌 전단도 뿌렸다. 시민들은 헬기를 향해 일제히 주먹을 휘둘렀다.

낮 12시 정각, 도청 옥상 깃봉에 검은 리본을 단 태극기가 반기로 계양됐다. 18일부터 나흘간 벌어진 공수부대의 살상행위로 숨진 영령을 추념하기 위한 조기였다. 조기 게양과 함께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움직임도 이어졌다. 오후 12시30분경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 등 20여명으로 '광주사태수습시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대책위는 논의 끝에 계엄당국에 제시할 7개 항목의 요구사항을 결정했다.

계엄군의 과잉 진압 인정, 구속학생과 민주인사 연행자 석방, 시민의 인명과 재산 피해 보상, 발포 명령 책임자 처벌과 국가 책임자의 사과, 사망자 장례식은 시민장으로 할 것, 수습 후 시민 학생들에 보복하지 말 것,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기 자진 회수와 반납, 무장 해제 등이었다.

일반수습위 협상 대표 8명은 오후 1시30분쯤 7개 요구사항을 들고 전남북계엄분소를 찾아가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계엄 당국의 입장은 강경했다.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대해 시민들이 과격하게 시위를 했기 때문이라며 '조건없는 무기 반납'만을 요구했다.

시민들은 오후 3시경부터 도청 앞에서 자발적으로 시민대회를 열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단상에 올라가 18일 이후부터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았다.

계엄당국과 첫 협상을 벌인 수습대책위원들은 오후 5시18분쯤 돌아왔다. 수습위원 8명이 차례로 단상에 올라 협상 내용과 자신들의 생각을 밝혔다.

이 중 협상 대표 일부가 "이런 식으로 해서는 결국 폭도밖에 안된다. 무기를 반납하고 치안질서를 경찰에 넘겨야 한다"고 발언하면서 일부 시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시민들이 납득할 만한 사태 수습 방안을 계엄당국이 먼저 제시한 후 무기를 반납해야 한다는 주장이 큰 호응을 얻었다. 이날 오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수습대책위'가 구성됐다.

이후 이어진 계엄당국과의 몇 차례 협상에서 가장 큰 쟁점은 '무기 반납'이었다. 계엄군의 강경기조에는 변화가 없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시민대표들의 입장은 더욱 곤혹스러워졌다.

계엄군은 전날 도청에서 철수한 후 광주를 포위했다. 군인들은 광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와 지방도로 등 주요 진입로를 봉쇄했다.

3공수여단은 호남고속도로와 연결되는 광주교도소 부근, 7공수와 11공수여단은 광주-화순간 도로, 20시단은 광주-나주간 도로인 효천역 부근을 통제했다.

계엄군은 각 도로를 봉쇄하고 주변 산간지역과 농촌지역까지 통제하며 지나가는 차량이나 시민에게 집중적으로 총격을 가해 시민 수십명이 사살당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특히 효천과 송암 지역에서는 24일 오후 1시경 계엄군과 20사단 간에 오인 사격이 벌어져 계엄군끼리 공격하다 공수대원 9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시민들이 광주 전역을 장악한 지 이틀째인 23일, 시민들은 빠른 속도로 질서를 회복했다. 공권력 부재 상태에도 시들은 시민자치공동체로 인간애와 질서를 실천하며 서로를 도왔다.

80년 5월 민주화운동 기간 길가에 솥을 걸고 밥을 하는 아주머니들. 시민군과 항쟁 지도부의 끼니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어다 준 밥으로 해결됐다.(5.18기념재단 제공) /ⓒ 뉴스1

시민들은 이날도 수백여명이 자발적으로 나와 길거리를 청소했다. 시장 주변 길가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아주머니들이 솥을 걸어 밥을 하고 밤새 경계근무를 서는 시민군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상점과 상가들도 조금씩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았다. 시장도 정상적으로 문을 열어 물건을 팔았지만 비상상황에서 우려되는 매점매석 등의 행위는 일체 발생하지 않았다.

23일 오후 3시 도청 앞 광장에서는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궐기대회는 26일까지 하루에 1~2차례씩 모두 5차례 진행됐다.

궐기대회를 통해 시민들은 '무기반납' 등 협상 의제에 대한 체계적인 의견 수렴은 물론, 도청의 시민군 지도부 교체를 통한 협상력 강화, 대학생 시민군 자원 병력 모집, 시민 생활을 질서 유지 활동 등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갔다.

시민들은 부족한 혈액을 보충하기 위해 헌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병원은 18일부터 이어진 계엄군의 폭력진압으로 부상자들이 넘쳐났다.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전남대병원, 광주기독병원, 적십자병원 등 광주 각지의 병원에 시민들이 모여들어 헌혈에 참여했다. 노인들과 술집 아가씨들까지 헌혈을 요청할 정도로 대대적인 참여가 이어졌다.

시민군과 광주시민들의 치안 노력도 빛났다. 시민군이 체계적으로 편성돼 효과적으로 방어와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공권력 부재 상태였음에도 광주시내 은행이나 금은방, 보석점 등 한 군데도 털린 곳이 없었다. 강력사건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시위 도중 희생된 시민들의 시신은 처음에는 병원에 안치됐다가 도청 근처의 상무관으로 옮겨졌다. 상무관은 통곡소리로 가득했다.

시민자치공동체는 빛을 발했으나 해방 광주의 향방을 두고 수습위원회 내의 갈등은 깊어갔다.

무기 회수를 주장하는 온건파와 계엄군의 사과 및 재발 방지를 주장하는 강경파 사이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시민 대부분은 무기 회수는 해야 하지만, 무조건적인 반납은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수천여 정의 총기가 풀려 청소년들까지 무기를 들고 다니는 상황이 위험천만할 수 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제대로 된 협상 없이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수습위 위원들을 통한 무기회수는 계속됐다. 22일부터 25일까지 5000여정 중 4500여정의 무기가 회수됐다.

대다수는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했지만, 반발하는 시민군도 많았다. 특히 계엄군과 대치 상태가 계속되고 있던 지역에서는 무기 반납을 끝까지 거부했다.

무기회수를 둘러싼 수습대책위 내부의 갈등이 끝내 화해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선 것은 항쟁 7일째인 24일이었다. 오후 1시경 도청 상황실에서 학생수습대책위가 열려 항쟁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25일 밤 10시, 수습파와 갈등 끝에 김종배, 정상용, 윤상원, 박남선 등 항쟁파 중심으로 '민주투쟁위원회'라는 새 '항쟁 지도부'가 탄생했다.

항쟁 지도부는 26일 오전 무장 시민군의 전열부터 재정비했다. 자위대 편성 계획을 세우고 대치 상황이 장기화될 것도 대비했다. 광주시장과 전남도의 국장급 공무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여러 사항을 검토했다.

그러나 항쟁 지도부에게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계엄당국은 이때 이미 미군과 협의를 마치고 도청을 점거한 시민군 '소탕작전'을 펼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수뇌부는 25일 12시15분 계엄사령관에게 '상무 충정 작전' 디데이를 27일 새벽 0시1분 이후 실시하도록 결정했다.

전남도청에서 항쟁지도부가 탄생한 시각은 25일 밤 10시로 신군부 수뇌부가 도청 소탕작전을 결정한 이후였다. 신군부는 진압작전이 항쟁지도부의 출현, 즉 항쟁파의 등장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주장했으나 실은 그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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