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집단소송 239건 접수…기구한 사연 절절

4일 접수 마감…일본 전범기업 대상 소송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에 강제 징용된 후 열악한 처우를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한국인 노동자들의 사진이 처음 공개됐다. 국사편찬위원회는 1945년 남태평양 밀리환초에서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을 담은 사진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입수해 12일 공개했다. 사진은 일본에 반란을 일으킨 후 미군에 구조돼 구명보트로 이동 중인 한국인 징용자들이 안도하듯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2014.8.13/뉴스1 ⓒ News1

(광주=뉴스1) 황희규 기자 = "일본 탄광에서 사고를 당하고 돌아온 아버지를 돌보느라 초등학교도 못 다녔어"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집단소송 참여자를 모집 중인 가운데 광주와 전남지역 일본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속속 전해지고 있다.

1일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에 따르면 '일제 노무동원 피해자 손해배상 집단소송' 참여 접수 일주일 만에 239건이 접수됐다.

강제 징용 후 부상당해 힘들게 생활하거나 일본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이들 등 소송 참여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도 속속 알려지고 있다.

광주 남구 진월동에 사는 서기재씨의 부친은 1941년 5월쯤 순경에게 강제로 끌려가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한 탄광으로 보내졌다.

서씨의 부친은 탄광 막장 작업 중 천장이 무너지는 사고를 당했고 머리와 가슴 등을 심하게 다쳐 그해 6월쯤 현지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다.

같은해 11월쯤 한국으로 귀국했으나 병상에 누워 매일같이 피를 토하며 5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1950년 2월 42세에 별세했다.

아버지가 고향에 돌아올 당시 서씨는 전남 해남군 화산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는 투병 중인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어린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고 5년간 아버지를 보살피며 초등 교육을 전혀 받질 못했다.

광주 동구에 거주 중인 이희균씨(83)는 8살쯤 순사 2명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고 했다.

이후 아버지의 소식은 끊겼다. 이씨 또한 해방 이후 만신창이 몸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돌보느라 13살까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보낸 이씨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떡 장사 등 허드렛일을 하며 가족들을 부양했다.

화순 능주에 살았던 김순애씨의 아버지 김병덕씨는 젊은 나이에 이름도 모르는 일본의 한 탄광에 끌려가 허리도 못 펴며 강제노동을 했다.

고향으로 귀환한 김씨의 아버지는 숨넘어갈 듯 가슴을 쥐어짜는 등 천식으로 일생을 보냈다. 강제징용 후유증으로 경제적 활동을 못 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장터로 나가 채소를 팔며 생활비를 마련했다. 김씨의 할머니는 장남을 일본에 떠나보낸 뒤 정신병을 앓기도 했다.

해방 뒤 일본에서 작은 배를 타고 부산까지 넘어오는 과정에서 숨진 사연도 있었다.

최만일씨는 면서기 2명이 형님을 강제로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최씨의 형님은 일본 홋카이도 한 탄광에서 일하며 동생에게 연필을 사 보내기도 했다.

배를 타고 한국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소식이 마지막이었다. 최씨는 형님을 찾으려 했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1946년 5월6일 사망신고를 했다.

시민모임과 민변 광주전남지부는 오는 4일까지 참여자를 접수해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다.

소송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지원과'로부터 강제동원 피해심의 결정통지서,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위로금 등 지급결정서 1통과 주민등록등본·가족관계증명서 각 1통씩 준비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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