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부장리유적, '간접지배 속 독자 세력'… 역사 종합토론

발굴 20년 맞아 국제학술대회… "마한에서 백제 지방세력"
금동관·분구묘 공백·사적 범위 확대… "부장리의 미래사"

서산 부장리고분군의 역사적 가치 확장을 위한 국제학술대회 마지막 종합토론 모습/뉴스1 2025.11.28 ⓒ 뉴스1 김태완 기자

(대전충남=뉴스1) 김태완 기자 = 발굴 20주년을 맞은 충남 서산 부장리유적을 두고 국내외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산 고대사’를 다시 짜는 뜨거운 토론을 벌였다. 결론은 단순했다. “서산 부장리는 백제의 변방이 아니라, 마한에서 백제로 이어진 독자 세력이 숨 쉬는 현장”이라는 것이다.

지난 27일 오후 서산문화원 대강당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 ‘서산 부장리유적의 역사적 가치 확장’ 종합토론에서는 임영진 전남대 교수가 좌장을 맡아 1시간 넘게 열띤 논의를 이끌었다. 임 교수는 “토론 항목만 30개가 넘는다”며 “학자들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서산 주민들이 고대사의 큰 흐름을 잡을 수 있도록 정리하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포문을 열었다.

첫 쟁점은 서산 지역 마한 소국의 실체였다. 강종원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위원은 예천동·인지면 일대 분구묘 밀집을 근거로 “서산 읍내와 그 인접 구릉지대가 마한 소국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에 다른 토론자는 “원삼국 시대 거점이 대체로 현재 도심 서쪽 구릉지대에 자리한다”며 “서산도 예천동 일대를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보완했다.

중국 산둥 연안 분구묘와의 관계도 도마에 올랐다. 중국 장타오 연구원은 산둥 분구묘가 “대략 전한 중기~후한 전기에 조성된, 서산보다 앞선 사례”라고 밝히며 일정한 영향 가능성을 제기했다. 조윤재 고려대 교수는 “후한 말기 산둥 지역 전란과 대규모 이민사를 함께 보아야 한다”며 “산둥 이주민이 서해를 건너와 서산 지역 형성과정에 관여했을 개연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가장 치열한 논쟁은 백제의 지배 방식과 금동관의 성격에서 나왔다. 토론자 대부분은 서산 부장리를 ‘백제 영역 안의 간접지배 지역’으로 보되, “지방세력의 역동성과 독자성이 강하게 유지된 특수한 사례”라는 점에 공감했다.

나용재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금동관·금동신발을 받은 시기에도 아직 직접지배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던 것 같다”며 “간접지배 안에서도 최고 수준의 우대를 받은 지방세력”이라고 평가했다.

일본 분구묘의 사회적 의의와 서산 부장리고분군과 관련 발표 모습/뉴스1 2025.11.28 ⓒ 뉴스1 김태완 기자

임 교수는 금동관을 두고 “독립된 군장의 왕관이 아니라 상투를 돋보이게 하는 ‘상투관’에 가깝다”며 “백제 중앙과 긴밀히 연결된 지방 유력자라는 상징”이라고 정리했다. 그는 “이 유물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서산 부장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며 ‘정확한 용어’를 거듭 강조했다.

5세기 후반 분구묘 조성이 멈춘 뒤, 6세기 후반 석실묘가 등장하기 전까지 약 100년 공백도 큰 화두였다. 이현숙 공주대 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여미리 고분군 일부 토기를 보면 분구묘가 5세기 중후반에 깔끔히 끊겼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대형 분구묘의 정치적 기능은 사라져도, 소규모 분구묘가 한동안 계속됐을 수 있다”고 제시했다.

이에 강 연구위원은 “부장리 분구묘를 만든 세력은 이후 규모와 형식이 달라진 무덤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며 “백제 대성팔족처럼 재지 기반을 바탕으로 사비기까지 영향력을 이어갔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산 마애여래삼존불 시주 세력과의 연관 가능성도 언급됐다.

토론의 마지막은 현재와 미래로 향했다. 학자들은 한목소리로 “부장리유적의 사적 지정 범위를 넓히고, 분구묘 주변 미조사 구역을 정밀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 교수는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작은 흔적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며 “부장리유적은 서산 시민이 함께 지켜가야 할 ‘살아 있는 교과서’”라고 말했다.

서산 부장리고분군 발굴 20주년 기념 및 사적지정 범위 확장을 위한 국제학술대회를 마치고 단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뉴스1 2025.11.28 ⓒ 뉴스1 김태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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