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문화원, 조선시대 수군 전초기지 ‘평신진’ 주제 강연 열어
군사거점이자 생활·행정 무대였던 대산읍 지역과 의미 재조명
- 김태완 기자
(서산=뉴스1) 김태완 기자 = 조선시대 수군의 전초기지 '평신진'(平薪鎭)을 주제로 한 강연이 충남 서산시에서 열렸다.
서산문화원은 최근 개최한 제9회 서산학 시민강좌에서 문광균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서해 바다의 수호자 평신진’을 주제로 강연했다고 19일 밝혔다.
이날 강연은 서해의 관문 가로림만을 지켜온 조선 수군의 전초, 평신진의 서산 대산항과 가로림만 내 역사적 의미를 조선시대 수군진 체계 속에서 차근차근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평신진은 조선시대 서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군영(軍營)으로, 지금의 서산·태안 일대에 위치한 옛 지명에서 비롯됐다. 당시 왜구의 침입을 막는 중요한 ‘서해의 방패’ 역할을 했다.
평신진은 바다를 막는 방어선이면서 동시에 바다로 나가는 통로를 관리하던 전초기지였다. 이곳은 단순한 군영이 아니라, 조운선(세곡선) 호송과 목장 관리, 염분·어전 점검, 호적·세수 등 행정 기능까지 겸한 군정 복합기관이었다. 강연은 “막는 길이 곧 나가는 길”이라는 문장으로 서해 항로의 이중적 성격을 설명했고, 이것이 오늘 서산의 산업·물류·관광 지형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짚었다.
문 연구원은 “해안 요충은 적을 막는 방어선이면서 동시에 교역과 소통의 통로”라고 짚었다. 부산·목포·여수 등 조선 수군진의 전통이 근대의 항만도시로 분화했듯, 서산 또한 대산항과 가로림만을 축으로 ‘방어와 개방’의 이중성을 품어 발전해 왔다는 분석이다. 가로림만 방어선의 변천을 조선 전기 (고)파지도 만호진(종4품) → 숙종 31년(1705) 함금진 설치 → 1711년 이전·개칭으로 ‘평신진’(종3품 첨절제사) 순으로 정리했다.
또 하나의 포인트는 터와 문헌이다. 강의는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반곡마을) 일대를 평신진 자리로 특정했고, 평신진 객사 ‘내하각(內何閣)’의 흔적과 관련 기록을 현대적 조사 과제로 제시했다.
특히 박용묵(1835~1838년 재임) 평신첨사가 ‘내하각’에서 남긴 ‘임하필기’ 속 시 수십 편을 “당대의 구휼·행정·군정 운영을 담은 1차 자료”로 평가하며, 서산시 차원의 체계적 수집·번역·출판을 제언했다. 비문(碑文) 실측과 지표조사,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까지 포함한 ‘평신진 프로젝트’를 지금 시작하자는 메시지다.
이날 이야기의 핵심은, 군사 요충은 시대가 바뀌어도 도시의 축을 만든다. 막는 길이 곧 나가는 길이었던 평신진의 역사처럼 서산은 오늘도 방어와 개방, 산업과 생태의 경계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문헌을 찾고, 비석을 읽고, 터를 측량하는 일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도시전략이라는 귀결이다.
평신진의 복원은 교육·관광 콘텐츠로 확장될 수 있고, 조운선 호송과 구휼 기록은 오늘의 재난·안전 거버넌스에도 참고가 된다는 평가다.
cosbank3412@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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