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생 이산상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황해도 출신 염길자 할머니

염길자 할머니가 인터뷰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대전=뉴스1) 신성룡 기자 ⓒ News1
염길자 할머니가 인터뷰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대전=뉴스1) 신성룡 기자 ⓒ News1

(대전=뉴스1) 김태진 기자 = 황해도 출신 염길자 할머니(81·대전 중구)는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을 한 달여 앞둔 29일 북에 두고 온 가족과 친지들의 생사를 걱정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염 할머니는 북한 황해도 평산군 남천읍 신남천리 38번지의 한 가옥에서 태어나 중학교 3학년까지 학창생활을 보냈다.

6.25전쟁 발발 후 9.28 후퇴로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남의 집 살이를 했다. 이후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다시 남한으로 내려오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다행히도 염 할머니는 피난 당시 6사단 준장의 차를 타고 남한으로 내려오게 됐다.

이때부터 염 할머니의 삶은 이북에 두고 온 가족과 친지들 걱정으로 황폐해져갔다.

"이북에서 내려온 후 저는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꼭 살아서 가족을 만나고 죽어야 죽겠다는 생각으로 한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염 할머니는 통일은 반드시 올 것이라며 북에 남기고 온 가족 등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왔다고 밝혔다.

염 할머니는 남한으로 피난 온 후 "청주 중앙공원에 있는데 이북 교복을 입고 있으니 어떤 분이 나를 불렀다. 이북에서 왔다고 하니 이분이 황경도 회령이 고향이라고 하며, 청주여고 선생님인데 내일부터 학교로 오라고 해서 학교를 다니게 됐다"며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정치부에 끌려가 죽음을 당한 큰오빠의 올케언니와 조카딸을 찾고 싶다"

염 할머니는 대한적십자사에 큰오빠의 올케언니 김진호(81·여)씨와 조카딸(71·여)을 찾아달라며 이산가족상봉 신청서를 접수했다.

염 할머니는 3.8선 인근에 살아서 피난을 오게 됐지만 올케언니와 조카딸은 3.8선과 거리가 먼 평양에 살아서 남한으로 함께 내려오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염 할머니는 “올케언니의 오빠가 평양의 노동신문사에 있었고 많은 정보를 줘서 우리가 피해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올케언니의 오빠는 3.8선을 넘다가 잡혀가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눈물을 쏟아냈다.

염 할머니는 이전 이산가족 찾기 신청 당시 상봉자 명단에 올케언니와 조카딸이 있었지만 상봉 당시 나오지 않았다며 북한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금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다고 밝혔다.

"올케언니~ 너무 너무 보고 싶구요. 그동안 소식이 너무 궁금했지만 어떻게 알아볼 방법이 없었어요. 미안하구 나는 여기 와서 잘 살고 있는데 이북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을지 걱정돼요. 물론 부모들이 반동군자 가족이니까 어떻게 사는지 짐작이 가지만"이라면서 염 할머니는 가슴에 묻어둔 가슴 아픈 사연을 하나둘씩 꺼냈다.

이어 "아직 그곳에서 목숨을 지키고 살고 있는지 반동군자 가족이라서 일하는데 끌려가 노동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걱정스럽다. 이북이기 때문에 가만히 두지는 않았을 것 같다"며 또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염 할머니는 “이북에 있는 사람들은 먹고 살 게 없어서 힘들다고 알고 있다. 저장식품 중 초코렛 등과 같은 것을 많이 싣고 가서 주고 싶고, 될 수 있다면 돈을 쥐어 주고 오고 싶다”고 말했다.

염 할머니는 "추석 전후로 이산가족 상봉하자고 할 것 같다. 우리들 같은 이산가족의 마을을 풀기 위해서라고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에 나설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경북 예천이 고향인 동갑내기 남편을 만나 중매 반 연예 반으로 결혼을 했다.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라며 남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한편 정부는 지난 28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적십자 실무접촉을 다음달 7일 판문점에서 갖자고 북측에 제안했다.

이번 실무접촉에서 남과북은 상봉일과 장소, 방법, 인원수 등을 논의할 예정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상봉행사는 오는 10월 중순께 갖게 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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