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의원선거(제3~19대)로 본 ‘김영삼과 부산정치’

22일 오전 0시 22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병으로 서거했다. 1987년 통일민주당 대선후보로 출마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부산 수영만 유세에서 두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 기록관) 2015.11.22/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부산ㆍ경남=뉴스1) 민왕기 기자 =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은 부산이었다. 그의 호 거산(巨山)은 출생지인 거제와 자신을 정치인으로 키워준 부산을 의미한다. 실제 부산 정치는 YS에 의해 개편되며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왔다. 그의 측근들도 아직 부산에 많이 포진해 있다. YS가 남긴 정치적 유산들은 부산을 관통했고, 아직까지 부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 김동영 전 정무장관, 최형우 전 내무장관 등 YS의 정치적 동지들을 비롯해 고 서석재 전 장관, 강삼재 전 신한국당 사무총장, 박관용 전 국회의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정의화 국회의장, 박종웅 새누리당 부산시당 고문 등 YS가 발탁한 PK 인물들이 많다. 이밖에도 그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하는 정치인들이 상당수다.

■1954년 ‘26세의 YS, 부산‧경남에 등장하다’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 선거 때 26세의 젊은 정치인 김영삼이 선거에 모습을 드러낸다. 자유당 이기붕 총무부장을 만난 그는 여당인 자유당 후보로 고향인 경남 거제에 출마했다. 결과는 당선이었다. 2만770표(44.77%)를 득표, 절반에 가까운 득표로 경쟁자들을 따돌렸다. 제헌국회 의원이었던 민주국민당 서순영 후보(1만4110표‧30.41%), 2대 국회의원이었던 이채오 후보(24.8%‧1만1509표)가 26세의 YS에게 쓴 잔을 마셨다.

그리고 당선된 해 12월, 이승만 정권의 3선 개헌에 항의해 탈당, 1990년 3당 합당 때까지 무려 36년간 야당 생활을 하게 된다. 자유당을 탈당한 YS는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때 부산 제2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 42.98%(1만8858표)를 얻어 50.44%(2만2131표)를 득표한 자유당 이상룡 후보에 석패했다. 고향 거제를 떠나 부산 정치를 처음 시작한 이 때 그는 실패를 경험했지만, 이후 부산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된다.

■4‧19 혁명 후 제5대 민‧참의원 동시선거서 부산 출마 ‘압승’

1960년 4월 19일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되고, 과도정부는 1960년 6월 27일 민·참의원 동시선거를 7월 29일에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YS는 부산 제2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나서 2만9754표, 66.87%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됐다. 무소속 서상남, 문정남 후보가 각각 15.7%와 11.09%, 사회대중당 강봉수 후보가 6.31%를 득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박정희 군부가 정권을 장악, 2공화국이 붕괴되고 제3공화국이 들어선다.

1963년 YS는 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이 선거는 과거와 달리 지역구 다수대표제로 131명의 의원을 선출하고, 전국구 비례대표제로 44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복합선거제도로 실시됐다. YS는 부산 서구에 출마해 41.65%(3만97967표)를 득표, 38.85%(3만7117표)를 득표한 집권여당 민주공화당 신중달 후보(1년 후인 1964년 부산상공회의소장을 맡게 된다)를 간발의 차로 제치고 의미있는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듬해인 1964년엔 민중당 창당에 참여했고, 1965년엔 민중당 원내총무로 선출돼 최연소 원내총무라는 기록도 세웠다. 1967년엔 신민당 창당에 참여 원내총무를 맡았다. 그해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부산 서구에 출마해 59.23%(6만1597표)를 득표, 38.57%(4만347표)에 그친 민주공화당 박규상 후보를 큰 표차로 제쳤다.

■부산에서만 7선… ‘박정희‧유신‧신군부와 맞서다’

1969년 YS는 두 번째 3선 개헌에 반대한다. 이승만 대통령에 이어 이번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이 일로 그는 초산 테러를 당했다. 이후 1970년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며, 제7대 대선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출마한다.

1971년 제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역시 부산 서구에 출마해 5선 국회의원이 됐다. 민주공화당엔 박찬종 후보가 나왔지만 3만여표의 대승을 거뒀다. 당시 부산 8대 국회의원 선거는 8곳에서 치러졌으며, 신민당이 6곳, 민주공화당이 2곳에서 이겼다. 부산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명실상부한 '야권의 도시'였다. 전국구 의원었던 이기택 신민당 부총재도 이때 처음 부산 동래구을에 출마해 당선됐다. 선거 이듬해인 1972년, 유신이 선포됐다. 이 소식을 들은 YS는 미국에서 급거 귀국했지만,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이듬해 2월인 1973년 2월27일 제9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전체 73개 선거구에서 2명씩을 선출하는 선거였다. YS는 이 선거에서 부산 제2 선거구에 나와 1위를 차지했고, 여당내 야당으로 불렸던 박찬종 변호사는 2위를 차지 함께 국회에 입성했다. 같은해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대정부질의에서 YS는 박정희정부 테러행위를 규탄하기도 했다. 1974년엔 만 45세로 최연소 야당총재로 선출됐고, 1975년 야당 총재로 박정희 대통령과 영수회담을 치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부산에 출마해 1위를 차지, 2위를 차지한 집권여당 후보 박찬종 변호사와 함께 국회에 들어갔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고 이듬해인 1981년 치러진 제 11대 국회의원선거 때부턴 YS의 사람들이 국회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1984년(제12대 총선), 1988년(제 13대 총선) 까지 YS가 발굴한 부산 정치인들이 많았다. 11대 총선 땐,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부산 제4선거구에 출마했고 12대 총선 땐 문정수, 서석재 전 의원, 13대 총선 땐 노무현 전 대통령, 최형우 전 의원이 정치 첫발을 뗐다.

하지만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을 선언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총 9번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부산에서만 7번(5~10대, 13대) 당선됐다. 명실상부한 부산 정치의 '거산'이었던 셈이다.

부산이 집권여당을 견제하며 야권 도시로서의 명성을 날린 것도 3당 합당과 함께 끝이었다. 집권여당 민정당과 합당한 주요 야당은 민자당이라는 새로운 여당으로 거듭났고, YS는 총재를 맡게 된다.

이후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자당은 무소속 서석재 후보가 출마한 사하구를 제외한 전 지역구에서 부산을 석권하게 됐다. 이 때 노 전 대통령은 부산 동구에 '꼬마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13대 총선 당시 큰 격차로 이긴 바 있던 민정당 출신 허삼수 후보에게 30%차로 대패했다. 1993년 YS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최초의 문민정부는 그렇게 탄생했다.

■한국정치 이끄는 YS의 '정치적 아들들과 방계들'

YS가 대통령이던 1996년 15대 총선에선 정의화 국회의장, 홍인길 의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이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나왔다.

최형우 전 장관의 특별보좌역을 지낸 안경률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2000년 16대 총선 때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김영춘 새정치민주연합 부산시당 원장도 16대 총선 때 국회에 입성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보좌관을 지낸 이진복(동래구) 의원은 2008년 18대 국회때 정계에 나와 3선 고지를 노리고 있다. 상도동계 막내로 불리는 오규석 기장군수도 재선 군수로 내년 총선 출마설이 나온다. 그리고 김무성 당 대표를 포함한 이들 상당수가 “YS는 내 정치적 아버지”라는 얘기를 했다.

부산 정가에선 YS에게 정치적 빚을 진 정치인들이 여야 불문, 상당수라고 얘기한다. 1990년 3당 합당이 되기 전까지 ‘부산=야도’라는 공식도 YS로 인해 탄생했다는 얘기도 한다. YS가 3당 합당으로 여권의 수장이 된 후로 그 공식은 ‘부산=여도’라는 공식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YS가 부산 정치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얘기다. 대구‧경북(TK)과는 달리 부산‧경남(PK)의 경우 친박(친박근혜)계보다는 비박계가 더 득세하고 있는 것 역시 YS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등 부산 여야가 ‘YS 추모’에 예를 갖추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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