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석레인저가떴다] 산·호수·절, 해지는 서해까지…숨은 보배 '풍경 백화점'
변산바람꽃 살랑이는 내변산 9.9㎞ '작은 봉우리' 연속
직소보·봉래구곡·월명암·관음봉·내소사…봄의 길목을 걷다
- 신용석 기자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변산(邊山)은 국토 서쪽 끝에 돌출된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절경과 산을 일컫는 지명이다. 예전에는 채석강과 적벽강이라는 바닷가 절벽과 해수욕장으로 대표되는 외변산이 유명했으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첩첩한 산봉우리와 계곡과 사찰이 어우러진 내변산이 새로운 산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변산은 산과 바다가 부딪혀 이뤄진 독특한 지형과 지질, 기후에 따라 다양한 생태계가 형성돼 있다. 변산에서 처음 발견돼 세계에 변산을 알린 변산바람꽃이 있고, 변산에서만 사는 세계적인 희귀종인 민물고기 부안종개도 있다. 꽝꽝나무, 호랑가시나무 군락(식물집단)과 같은 천연기념물도 많다.
내(內)변산에는 내(內)장산처럼 그 안에 많은 절경이 은밀하게 숨어 있다. 동네 뒷동산같이 친근한 숲도 있고 큰 산임을 알리는 험한 봉우리도 있다. 산이 아니라 물을 만난 것처럼 색다른 호수와 폭포도 있고 저절로 마음이 가라앉는 절 풍경도 있다. 산 위에서 산과 바다와 호수와 들판과 마을을 조망한다. 어촌과 농촌과 산촌이 어울려 있다. 서해를 붉게 물들이는 일몰 풍경도 바라본다. 한마디로, 내변산은 풍경의 백화점이다.
내변산에는 가벼운 산책길도 있지만 어느 산 못지않게 힘을 써야 할 등산로도 있다. 400~500m급 봉우리들이지만 바닷가 해발에서 시작하는 높이라 만만치 않고, 하나의 봉우리를 올랐다가 완전히 내려서서 다른 봉우리를 오르는 코스는 1,000m급 산행의 난도가 있다. 오늘의 산행은 그런 코스, 남여치에서 직소폭포를 거쳐 관음봉에 오른 후 내소사로 내려가는 종주길이다.
◇ 남여치-월명암-직소폭포 5.1㎞ "천년고찰 지나 절경의 봉래구곡 산책"
들머리 남여치(藍輿峙)는 예전에 어떤 관료가 '지붕이 없는 가마'를 타고 오른 고개라는 뜻이다. 현재의 이곳은 국립공원의 무인안내소다. 작은 주차장과 화장실, 안내판이 있고, 등산로에 들어서면 '마스크 착용, 거리두기'를 알리는 자동 센서 방송이 작동한다. 예전에 이런 무인시설은 이유 없이 파손되기 일쑤였는데, 요즘은 상태가 좋다. 산행문화가 그만큼 좋아졌다.
등산로는 국립공원답게 처음부터 계속 오르막이다. 10분쯤 지나 콧등에 땀방울이 또르르 흘러 겉옷을 벗는다. 한번 쉬고 갈 만한 지점에 안전 쉼터가 있는데, 일행의 리더가 그냥 지나가니, 뒤따르던 사람들이 '할 말 못하고' 헉헉대며 따라간다. 산에서는 리더를 잘 만나야 한다.
쌍선봉(459m) 삼거리에 쌍선봉은 출입 금지라는 현수막이 설치돼 있다. 이곳은 헬기장이 있던 곳으로 취사·야영이 성행하고 산불위험이 많은 장소다. 어떤 사람이 과감하게 금줄을 넘어 다녀와서는 "봉우리 같지도 않고 전망도 없다!"며 투덜댄다. 현수막에 봉우리 사진과 구체적인 출입 금지 사유를 적고, '삼거리'라는 지명을 없애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월명암 가까운 숲에 너도밤나무, 서어나무, 졸참나무가 살고 있다. 숲의 역사가 오래된 곳에서 자라는 나무들이다. 깊은 숲에 들어온 것이다. 조용한 산에 낭랑하게 울리는 독경 소리를 들으며 월명암에 들어선다. 월명무애(月明霧靄)라고 칭송할 만큼 달빛이 밝은가 하면, 자욱한 안개와 아지랑이도 일품이고, 뒷산에서 보는 낙조도 천하제일인 절이다. 그러나 뒷산의 낙조대 역시 출입 금지구역이다. 낙조를 보려는 사람들에 의해 절의 조용한 수행환경이 저해되고, 비박과 야간산행으로 인한 폐해가 많아서다.
월명암을 뒤로하고 평탄한 오솔길을 내려서다 몇 군데 바위 끝에서 내변산 전망을 한다. 멀리 늘어선 여러 봉우리의 실루엣 중에 오늘 가야 할 관음봉이 뾰족하고, 그 아래에 산중호수 직소보가 손톱만 하게 보인다. 저렇게 멀단 말인가. 급경사 계단, 돌길을 따라 산 하나를 완전히 내려오니 계곡물 소리가 졸졸졸, 사람 소리가 수런수런 들린다. 자연보호헌장비가 있는 삼거리에서 구두와 운동화와 등산화가 섞인다. 봉래산(금강산)처럼 아름다운 아홉 개의 절경이 있어 봉래구곡(九曲)이라 부르는 계곡길이다.
봉래구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은 구곡을 정한 후 새로 나온 직소보(洑)의 호수다. 농업용수로 쓰려고 계곡을 막아서 만든 인공호수지만 아름다운 산세 밑에 조용히 담겨 있는 수면과 거기에 투영된 산 그림자가 한 폭의 동양화가 된다. 오늘 이 호수엔 우윳빛 두꺼운 얼음, 투명한 살얼음, 그리고 얼음이 풀린 봄물이 함께 있다. 직소보라는 토목용어 대신에 곱고 예쁜 이름을 지었으면 좋겠다.
호수의 테두리를 따라 끝자락에 다가서니, 울퉁불퉁한 암반에 다소곳이 들어선 선녀탕과 분옥담이라는 물웅덩이가 있고, 그 위에 계곡에서 뚝 떨어지는 직소폭포가 있다. 데크 전망대에서 바라본 폭포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신이 '서슴없이' 다이빙을 하는 모습이다. 다이빙대의 높이는 30m다.
◇ 직소폭포-재백이고개-내소사 4.8㎞ "헉헉대며 오른 관음봉, 가스 자욱"
다시 산을 오른다. 직소폭포 위 계곡길은 등산로라기보단 자연의 양탄자라고 할까, 부드러운 흙에 갈색 낙엽이 덮여 푹신하고, 얼음이 풀려 질퍽한 길에는 황마매트가 깔렸다. 햇빛이 깊게 비추는 저 숲 바닥 어딘가에 몸이 근질근질한 씨앗이 막 싹을 틔우는 야생화가 있을 것이다. 봄볕을 쪼이며 다시 땀이 나는 내 몸도 간지럽다.
이런 신선길을 지나, 재백이 고개를 넘어 관음봉을 향한다. 재백(宰伯)이란 직소폭포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가던 원님이 쉬던 곳이라는 의미다. 예전 어떤 해설사는 오르고 넘어야 할 재(고개)가 많다는 뜻도 있다고 했는데, 과연 여기부터 관음봉까지는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는 구간이다. 급경사 암릉에서 쇠난간 로프를 붙잡고 오르는 길, 단숨에 오르기 벅찬 계단, 올라서면 내리막이고 또 올라가야 하는 바윗길을 지나 드디어 관음봉 삼거리에 도착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람들의 얼굴에 내변산을 얕잡아 봤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여기서 관음봉을 오르려면 왕복 1.2㎞의 '쉽지 않은' 암릉길을 다녀와야 한다. 체력이 부치는 사람들은 "오늘 '까쓰'가 차서 전망이 안좋다"는 이유로 내소사로 직진한다. 관음봉을 오르기 위해 다시 내리막을 내려서고 봉우리의 허리를 빙 둘러 걸어서 천정에 낙석보호망을 설치한 철제 다리를 올라선다. 이 다리를 오르려면 계단입구의 산벚나무 뿌리를 디딤목으로 밟고 올라서야 한다. 아무리 나무를 배려하려 해도 밟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다. 사람이 통과하기 편하게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이 나무에게도 정이품송과 같은 벼슬을 줬으면 한다.
어느 정상이나 다 똑같다, 정상 직전에 가장 어려운 오르막이 있다. 직각의 암벽에 붙여 설치한 높은 계단을 오르고, 다시 급경사 흙길 계단을 올라 관음봉(424m) 정상에 섰다. 변산의 최고봉은 의상봉(508m)이지만 산의 외곽에 치우쳐 있고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할 수 없다. 제2봉인 쌍선봉도 출입금지라, 제3봉인 관음봉이 주봉인 셈이다. 세 번째 왕자가 임금이 된 세종대왕과 같은 이치일까?
오늘의 관음봉은 미세먼지인지, 해무(海霧)인지, 봄 아지랑이인지 '까쓰'가 꽉 들어차 조망이 어렵다. 멋진 일출을 보기 어려운 것처럼, 이제는 대낮의 산에서도 삼대의 덕이 필요하다. 멀리 곰소만 바다와 그 아래 어촌과 들녘 풍경이 아른거리고, 뺑 둘러 산 풍경도 능선의 윤곽선만 어른거린다. 허리 높이의 작은 정상석에서 인증사진만 찍고 내려선다.
올라설 땐 몰랐는데, 잔설과 잔빙과 진흙으로 미끌미끌한 길을 조심조심 내려서서 관음봉 삼거리로 돌아와 내소사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바위길 틈틈이 내소사 전경을 바라본다. 미니어처(축소모형)를 보듯, 조감도를 보듯, 장난감 같은 절 지붕들 사이사이로 사람들 움직임이 고물고물하다. 드디어 내소사 전나무 숲에 들어서면서 하산을 완료한다. 남여치에서 9.9㎞, 5시간쯤 걸었다.
◇ 내소사와 전나무 숲길 "만물이 소생하는 내소사, 우아한 전나무 숲길"
내변산이 생길 때 내소사도 들어앉은 듯, 산과 절이 딱 맞춤하여 세팅된 내소사는 언제 와도 따듯하고 친근하다. 단청이 빛바랜 민낯의 절집들이 더 곱고 살가운 절이다. '다시 살아난다'는 뜻을 가진 내소사(來蘇寺)다. 오늘의 내소사는 그 이름처럼 겨울로부터 소생하는 봄 풍경이 완연하다. 천년생 느티나무 거목의 부러진 줄기에서 돋아난 잔가지에 물이 올라 나무 전체가 벌겋게 부풀고 있다. 관음봉 병풍 아래 대웅전과 석탑도, 꽃살문의 꽃들도, 분재같은 소나무와 산수유도, 천왕문 바깥의 단풍나무 노목들도 모두 봄 햇살에 부풀어 '소생하는' 모습이다.
절을 나와 전나무 숲을 걷는다. 오대산의 월정사 전나무숲이 웅장하고 엄숙하다면, 변산의 내소사 전나무숲은 늘씬하고 우아하다. 전나무 나뭇가지가 흔들어서 내는 바람일까, 산행을 마친 여행자에게 따듯한 미풍이 불어준다.
외변산 바닷가를 스치며 변산을 떠난다. 벌겋게 물든 수평선을 바라보니, 영화 '변산'에서 "장엄하고 이쁘고도 슬프고도 고왔던 노을"이라고 했던 김고은의 대사가 생각난다. 부안 벌판을 지나며, 시인 매창이 이곳에서 읇었던 시 '이화우(梨花雨/배꽃이 떨어져 날리는 꽃비)'도 떠오른다. "이화우 흩날릴 때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곧 하얀 배꽃이 필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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