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세요"…다시 읽는 故 김수환 추기경 어록
침묵과 용기있는 발언으로 한국사회 방향 제시
- 염지은 기자
(서울=뉴스1) 염지은 기자 =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이 말을 남기고 떠난 고(故) 김수환 추기경(1922.5.8~2009.2.16)이 선종한 지 16일로 꼭 5년이 됐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족적을 남긴 김 추기경의 삶은 격동기를 헤쳐 온 우리 현대사와 교회의 성장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시대의 양심이자 큰 어른이었던 김 추기경은 때로는 중용의 침묵으로, 때로는 용기있는 발언으로 한국 사회와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줬다.
그는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밝힌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말을 실천했다.
서울대교구는 16일 김 추기경 선종 5주기를 맞아 그가 서울대교구장으로 봉직했던 1968부터 1998년까지 30년간의 어록을 다시 돌아봤다.
◇ 1971년 성탄 메시지 '빛을 찾고 있는 사람들'
"…정부나 교회나 사회 지도층은 국민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양심의 외침을 질식시켜서는 안 됩니다.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 혁명이란 양자 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릅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 동의없이 긴급 조치를 발동해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국가 보위에 관한 비상 대권'을 주는 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국회에 으름장을 놓았다. 독재를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김 추기경은 성탄 자정 미사에서 이를 질타했고, 텔레비전을 통해 미사 중계를 시청하다가 화가 난 박 대통령은 생방송 중지 명령을 내렸다.
◇ 1973년 12월 16일 YMCA 강연
"…이른바 10월 유신 체제로 정부는 민권과 정상적 민주 헌정 질서를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일방적으로 국민의 추종만을 강요해 왔고 또한 국민을 정치와 경제의 수단으로 격하시켜 왔습니다. 자신들의 정당한 권익, 때로는 기본 인권까지도 잘 보호해 주지 않고 오히려 부당하게 억제한다면 그런 정부를 어느 국민이 신임할 수 있겠습니까?
최근에 자칫 잘못되면 이 나라를 파국으로까지 몰고 갈 수도 있었던 학원 사태 등은 국민이 지닌 정부에 대한 이 같은 불신 표명의 단면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신헌법이 통과된 지 1년이 지난 시기, 감히 정권에 맞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때였다. 헌법 개정을 입에 담기만 해도 잡혀갈 수 있었던 이때 김 추기경은 헌법 개정과 민주 체제로의 복귀를 촉구했다.
"국민의 국정 참여를 제도적으로 소외시키고 있는 현재 체제를 지양하고 현재의 헌법을 개정하여 3권 분립과 평화적 정권 교체가 제도적으로 확립된 주권 재민의 올바른 민주 체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장을 정부는 반체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분명히 민주 공화국입니다. 민주 공화국 체제가 변질된 민주 체제를 정상화시키라는 것입니다…."
◇ 1979년 11월3일 박정희 대통령 추모미사 강론
"…고인이 생전에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스스로 민족 중흥을 위한 큰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이루신 공적이 크고 파란 만장한 생애를 사셨으며, 최후가 비극적이었지만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 고인이 평안히 쉬게 해주시길 충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군사독재를 한 박 대통령을 추모하는 미사를 집전한다고 해서 당시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고인의 허물과 함께 우리 민족에 기여한 공로를 기억하면서 하느님 품에서 편히 쉬기를 기원했다. 대통령 역시 하느님 앞에서는 불쌍한 한마리 양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분은 정사를 담당하신 이후 국토 구석구석 국민 생활 속속들이 관심을 가지셨고 실로 삼천리 방방곡곡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마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들을 홀로 직접 처리하려는 것이 그분에게는 오히려 큰 부담을 안겨 주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 1980년 봄 시국에 관한 담화문 '민족적 위기 극복'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군에 의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 진압이 도에 넘침으로써 군경을 포함하여 학생과 시민 등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한 데 대해 정부는 깊이 사과하고 그 같은 엄청난 유혈 사태를 일으킨 책임자를 정부는 엄단해야 합니다. 이것을 군부는 치욕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는 유혈 사태를 빚어 내고 민족적 단합을 파괴함으로써 그 자체로써 공산화의 위험을 더 크게 만든 결과를 감안한다면 국토 방위의 신성한 사명을 첫 임무로 삼고 있는 군이 오히려 자진해서 취해야 할 조처라고 믿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을 겪었지만 그 누구도 선뜻 비극의 불씨를 지핀 신군부에 대항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김 추기경은 유혈 사태를 초래한 책임자 엄벌과 민주 헌정 확립을 강력히 요구했다.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김 추기경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자신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일이 광주의 비극이며, 가슴 저 깊은 곳에 '한'으로 남아 있다고 토로한 바 있다.
◇ 1984년 11월 '샘이 깊은 물' 창간호 기고 '어머니 우리 어머니'
"…어머니가 가시고 난 30여 년 동안에 성묘도 자주 못하였고 어머니를 위한 기도도 자주 드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가끔 생각하게 된다. 나는 코린토 전서 13장의 '사랑의 찬가'를 좋아하는데 이 세상에서 그 완전한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이 어머니의 사랑, 우리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라고 결코 완전 무결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나에게 어머니의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코린 13,7) 사랑이다. 가실 줄 모르는 사랑, 그것이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 1987년 1월26일 고 박종철씨 추모미사 강론
"…인권을 옹호하고 존중해야 할 공권력에 의하여 오히려 인권이 말할 수 없이 거듭거듭 유린되고,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일 때 우리는 공권력 행사의 최고 책임을 지고 있는 이 정권의 도덕성에 대하여 깊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그의 희생이 우리의 정의로운 민주 회복의 도정에 승리의 분기점이 되고 저력이 되어 줄 수 있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기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통해 억울하게 현재 투옥 중에 있는 모든 양심인들의 석방을 바랍니다…."
서울대생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은 막바지로 접어든 제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이는 1987년 민주화 항쟁의 불씨가 됐고,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실질적 민주화의 분기점이 됐다.
◇ 1987년 9월20일 미국 뉴욕 성 패트릭 성당에서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 미사 강론
"…오늘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은 곧 우리들 한국인의 신원을 확인하는 축제입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깨우칠 때, 우리 한국인은 뭉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6살 난 소년 김대건은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모방 신부의 물음에, '나의 소원은 단 한 가지, 겨레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주의, 우선 돈부터 벌고 보자는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혼란한 한국 사회를 위해 진실로 기도하고, 겹치는 재해로 인해 깊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는 조국의 농민들을 향해 사랑의 팔을 뻗칠 때, 우리는 순교 정신으로 살아가는 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1998년 11월22일 신학생들과의 미사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권력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시고, 반대로 백성을 위해 모든 이 아래 종이 되어 봉사함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한마디로 겸손과 사랑으로 왕노릇하는 분이십니다.…우리는 이 주님의 겸손을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사제가 된 우리, 사제가 될 신학생들에게 제일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1998년 6월22일 수도자평신도와의 감사미사
"…30년간 봉직했던 교구장직을 떠나면서 여러분과 함께 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요한 8,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진리 자체이십니다. 저는 저의 마음을 다하여 저의 목숨, 저의 모든 것을 걸고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참으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사도 바오로와 같이 저도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습니다…."
"…제가 주교로서 택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표어는 예수님이 수난 전날 저녁에 당신 자신을 제자들에게 먹을 음식으로 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주님의 이 말씀을 감히 택한 것은 저도 주님을 본받아 제 자신을 완전히 신자들을 위해 바치는 주교가 되고자 원했기 때문입니다.…지금의 제 심경은 비록 마지막 단계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저의 인간적 취약성은 여전하지만, 그 표어대로 저를 여러분을 위해 드리고 싶습니다…."
◇ 연도미상 청소년을 위한 글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을 생각할 때 나의 가슴은 한없이 벅차오릅니다.…여러분 중에 특히 어린 나이에 벌서부터 삶의 고달픈 짐을 힘겹게 져야 했던 젊은이들에게 나는 더 각별한 애정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두려워 마세요, 힘을 내세요! 우리의 별빛은 까만 밤일수록 더욱 찬란해집니다. 막연하고 앞이 캄캄히 느껴지는 순간일수록 여러분의 가슴 속 깊이에서 비추이는 그 별빛을 찾으십시오. 그때는 무언가 소중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순간입니다…."
◇ 연도미상 청년들을 위한 글
"…세상이 어지럽다고 해서, 나의 인생도 의미가 없다고 하여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삶의 의미가 없는 쪽으로 많이 생각하여 흘러가는 대로 내맡기는 경향이고, 사회 전체의 매커니즘 속에 떨어지고 마는 상황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다수가 삶의 의미가 있다는 걸 발견하고 산다면 사회는 달라질 것입니다…."
senajy7@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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