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덧쓰는 시간이 쌓인 흔적"…박예림 '어스 팰림세스트' 展

김리아갤러리 8일~11월 7일

박예림 '어스 팰림세스트' 展 포스터 (김리아갤러리 제공)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흘러간 시간을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아 올려 대자연의 깊은 숨결을 표현한 특별한 미술 전시가 열린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자리한 김리아갤러리는 8일부터 11월 7일까지 한 달 동안 박예림 작가의 개인전 '어스 팰림세스트 Earth Palimpsest'를 선보인다. 전시의 중심 주제인 '팰림세스트'는 예전 글자를 깨끗이 지운 뒤 그 자리에 다시 새 글을 적어 넣던 옛 양피지 기록 방식에서 따온 말이다. 지워짐과 덧씀이 반복되는 지구의 유구한 역사를 시각 예술로 풀어냈다.

작가는 산골짜기 시냇물이나 거친 파도, 자욱한 안개 같은 자연의 풍경을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로 흉내 내어 그리지 않는다. 얇은 전통 한지에 먹으로 굵직한 선을 그어 물방울의 흐름을 표현하고, 그 위에 고운 모래 알갱이를 수없이 덧붙였다가 털어내는 복잡한 수작업을 거친다. 처음 그렸던 먹 자국은 거친 모래밭 밑으로 숨어들고, 그 위에 다시 붓질이 더해지면서 화면은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낸 바위벽처럼 묵직한 지층의 질감을 뿜어낸다.

박예림_디테일_Letters from the Waves_, 한지에 모래, 먹, 분채, 203 x 140 cm, 2026 (1-1) (김리아갤러리 제공)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관람객은 한 폭의 그림을 넘어 거대한 시간의 숲속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입구에서 은은한 햇빛을 머금은 한지 작품으로 출발한 동선은 모래와 시커먼 그을음이 묻어난 평면을 지나,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빛의 방과 새까맣게 타버린 나무 조각이 놓인 깊숙한 방으로 관람자를 이끈다.

미술관 관계자는 "지워지고 다시 얹히는 작업의 흔적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마음속에 묻어둔 풍경의 조각들이 거대한 공간 속에서 새롭게 되살아나는 신비로운 경험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스마트폰 화면 속 데이터로 떴다 사라지는 빠른 세상이다. 지우고 덧칠하는 번거로운 노동을 기꺼이 감내하며 완성한 이 투박한 지층의 기록들은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자연과 시간의 참된 무게를 되묻는다.

acenes@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