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장애가 보였다, 끝에는 인간만 남았다…연극 '크립스'

[리뷰] 남자화장실에 숨은 뇌병변장애인 넷…'크립스'가 묻는 삶을 선택할 용기
20일까지 서울 모두예술극장…호종민·백우람·유두선·신강수·홍성훈·정나무·양대은 출연

연극 '크립스' 출연진 (모두의예술극장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6.9.17/뉴스1

(서울=뉴스1)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 '크립스'(Creeps)는 배경 정보를 모르면 곤혹스러운 연극이다. 장애인이 느끼는 좌절을 날것 그대로 거칠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불명확한 발성 때문에 자막 없이 대사를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끝나면 장애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오직 인간에게 집중하는 묵직한 감동에서 좀처럼 빠져나오기 어렵다.

이 연극을 관람한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었다. 꼭 봐야할 연극이 있다고 연락이 왔다. 지인은 작품명도 알려주지 않았다. 간만에 얼굴이나 보자 싶어서 공연장을 찾아가면서 '아차' 싶었다. 국내 최초의 장애예술인 표준 공연장인 서울 충정로 모두예술극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흉내내는 작품이겠다 싶었는데 공연 안내부터 뇌정지가 왔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나온 마이클(홍성훈 배우)은 블루투스로 연결해 목소리를 내는 보완의사소통 기기를 통해 안내사항을 전달했다. 그를 비롯해 출연배우 7명 중 5명이 장애인이었다.

짧겠거니 싶었는데 공연 시간도 쉬는 시간 없이 130분이었다.

무대는 장애인을 위한 보호작업시설의 남자화장실이었다. 샘(유두선 분)은 벽돌을 사포질하고, 피트(호종민 분)는 양탄자를 짜고, 톰(백우람 분)은 종이상자를 접어야 했지만 이들은 성취감 없는 반복노동이 싫어서 화장실로 모였다. 감시하러 온 변절자 짐(신강수 분)마저도 합류해서 줄담배를 피우고 지독한 성적 농담을 이어갔다.

이들은 세상을 경멸하고, 서로에게 부정적이고, 스스로에게 자조적이었다. 몸이 비틀어진 인간들이 마음까지 꼬이게 된 과정은 극을 진행하면서 하나씩 풀려간다. 듣다보면 마음의 상처가 없으면 이상한 상황이었다. 관극의 재미를 위해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이 작품은 60분쯤 지나면 관객이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극 초반에는 무대 벽면에 쏘는 자막을 같이 봐야 대화를 이해할 수 있었는데 점점 자막 없이도 대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울러 불편하기만 했던 배우들의 뒤틀린 동작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제야 장애에 가려졌던 이들의 좌절된 꿈도 알게 된다. 톰은 추상화가를, 피트는 목수를, 짐은 작가를 꿈꿨다. 연극의 끝은 톰이 화가가 되려고 보호작업시설을 떠나고 작가를 꿈꿨던 짐이 혼자 남게 된다.

결국 잠들지 못하고 끝까지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 공연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요약하자면, 이 연극은 작가의 말처럼 자기 삶의 운명을 스스로 거머쥘 용기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울러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뇌병변장애인 짐이 바로 데이비드 프리먼(David Freeman)이었다. 프리먼은 시설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1964년 에세이 '불가능의 세계'를 발표했다. 이후 드라마 대본으로 개작했으나 제작이 엎어졌고, 1970년에서야 연극 '크립스'로 초연했다.

프리먼이 입에 문 연필로 타자기를 한타 한타 누른 끝에 완성한 작품임을 알게 되자 소름이 돋았다. 이 연극은 1971년 캐나다 드라마데스크 최우수 신인 극작가상을 받았고, 캐나다방송협회가 선정한 '20세기 캐나다 연극을 영원히 바꾼 작품들' 중 하나에 선정됐다.

제목 '크립스'(creeps)는 중의적 의미로 쓰였다. 지체장애인을 비하하는 크리플즈(Cripples)와 비슷한 발음이면서 소름끼치고 불쾌한 사람을 뜻한다. 이 연극의 아쉬운 점도 하나 있다. 공연 기간이 짧다. 20일까지다. 서두른다면 헛되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다.

art@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