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굴욕 사진 없애라…이강백 신작 연극 '어둠상자'

예술의전당 개관 30주년기념작 12월2일까지 자유소극장 공연

연극 '어둠상자' 공연장면ⓒ News1

(서울=뉴스1)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 눈을 반쯤 감거나 어색한 표정이 담긴 사진은 요즘에야 쉽게 버릴 수 있지만 사진이 처음 도입된 1900년대 초반에는 사정이 다르다.

카메라 1대가 기와집 몇 채를 줘야 구매할 수가 있었고, 사진 1장을 찍기 위해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더군다나 피사체가 고종황제라면?

연극 '어둠상자'는 대한제국 황실 전속 사진사 가문이 4대에 거쳐 고종황제의 어색한 표정이 담긴 사진을 없애려는 노력을 담아냈다.

고종황제는 이 어진(御眞·임금의 초상화나 사진)을 1905년 미국 사절단과 함께 조선에 온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에게 선물한다.

앨리스는 이 사진에 대해 "황제다운 존재감이 없는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라고 혹평한다. 고종은 뒤늦게 사태를 수습하려 '내 사진을 찾아내 없애라'는 어명을 황실 전속 사진사 김규진(이길)에게 내린다.

연극 '어둠상자' 공연장면. 왼쪽부터 4대 김기태(윤대홍), 대한제국 황실사진가인 1대 김규진(이길) 2대 김석연(장한새) 3대 김만우(이현호)ⓒ News1

김규진이 앨리스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사진을 찾을 길은 쉽지 않다. 김규진의 아들 김석연(장한새)은 사진을 찾지 못한 좌절감에 광복 직전에 자살하고, 그의 아들 김만우(이현호)는 카투사로 전역한 이후 평생을 기지촌에 머물며 사진을 되찾으려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3대에 걸친 노력은 대리모에 의해 태어난 김기태(윤대홍)가 마무리를 짓는다. 김기태는 국립현대미술관 직원인 강윤아(고애리)에게 미국 박물관에 보관된 이 사진의 전시를 제안하는 과정에서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김기태는 가문의 유지를 거역할 수가 없어서 애인 강윤아에게 미리 이별을 선언하고 미술관에 전시된 고종황제의 사진을 찢는다.

연극 '어둠상자' 공연장면. 국립현대미술관 직원 강윤아(고애리, 왼쪽)과 김기태(윤대홍)ⓒ News1

작가 이강백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보태 이 희곡을 완성했다. 연출가 이수인은 3시간이 넘는 희곡을 공연시간 2시간10분으로 압축했다. 이 과정에서 김기태가 사진을 찢는 마지막 장면 등이 합리적 추론에 의해 바뀌었다.

다만 주인공들이 사진 1장 때문에 조선이 멸망했다는 신념을 의심 없이 공연 내내 이어가는 설정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또 모든 장면들이 갈등을 드러내기보다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쉽다.

원로 극작가 이강백의 신작인 '어둠상자'는 예술의전당 개관 30주년 기념작이며 지난 7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서 개막해 오는 12월2일까지 공연한다.

연극 '어둠상자' 공연장면. 김기태(윤대홍)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된 고종황제의 사진을 찢는다.ⓒ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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