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10세가 마르틴 루터 파문 [김정한의 역사&오늘]

1521년 1월 3일

마르틴 루터 (출처: 루카스 크라나흐, 1529,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521년 1월 3일, 교황 레오 10세가 교서 '로마 교황의 판결'을 공포했다. 이 문서는 신학 교수 마르틴 루터를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파문한다는 선언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1517년 비텐베르크 성곽 교회 정문에 게시된 '95개조 반박문'이었다. 당시 교황청은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남발했다. 루터는 복음의 본질이 외적인 기부가 아닌 내면의 회개에 있음을 강조하며 이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당초 교황청은 이를 독일의 사소한 소란으로 치부했으나, 인쇄술을 타고 루터의 사상은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을 거치며 루터는 "교황과 공의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선언했고, 논쟁의 핵심은 면죄부에서 교황의 수수권과 교회의 권위 문제로 이동했다.

1520년 6월, 교황은 교서 '주여 일어나소서'를 통해 루터에게 60일 이내에 주장을 철회할 것을 명령했으나, 루터는 이 교서를 대중 앞에서 불태우며 결별을 택했다. 이에 교황은 그에 대한 최종 파문을 선언했다. 중세 사회에서 파문은 법적 보호를 상실한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다.

로마는 황제 카를 5세에게 루터의 처단을 압박했고,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 소환됐다. 그러나 루터는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며 철회를 거부했다. 이후 루터는 독일 영주들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신하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는 사제들의 지식 독점을 깨뜨리고 민중의 언어로 신앙을 돌려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레오 10세의 파문 선언은 이단 척결을 목표로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기독교의 영구적 분열과 종교개혁의 고착화를 가져왔다. 이 사건은 개인의 양심과 이성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근대적 세계관의 탄생을 알렸다. 이는 교황의 절대 권력이 쇠퇴하고 근대 세속 국가 체제가 등장하는 정치적 변화의 기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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