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이상의 배신…게티즈버그 전투(상)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남북전쟁이 발발한 지 3년 차이던 1863년 여름, 남부의 영웅 로버트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 정예 3개 군단, 7만 5000명이 조용히 북진을 시작했다. 당시 북군은 북군의 최고 장수라 할 수 있는 율리시스 그랜트가 남군의 전략요충 빅스버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랜트의 공격은 집요했고, 물러서지 않았다. 남군은 전쟁 개시 이래 처음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리에게 즉시 구원군을 보내 빅스버그를 구하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보통의 장군이었다면 이런 요구 자체를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리 장군은 남부의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카리스마를 얻고 있었던 영웅이었다. 남북전쟁은 객관적 분석으로는 남부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전투에서 남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리의 탁월한 지도력과 전술 감각, 북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세한 유능한 지휘관들 덕분이었다. 하지만 리는 남군의 운명에 드리워져 있는 불길한 징조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에 있는 남북전쟁 당시 대포 모형. (필자 제공)
한 번의 모험으로 전쟁을 끝낸다

북부는 여전히 막대한 물량과 군대를 동원해서 남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남군은 이 공세를 화려하게 막아냈지만, 거듭된 멋진 승리에도 불구하고 북군이 공격하고 남군이 방어한다는 전쟁의 구도는 전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산업력, 경제력, 국제 외교에서 북부는 남부에 압도적 우위였다. 전쟁이 장기 소모전으로 간다면 남부의 패배는 명확했다.

마침내 그랜트라는 뚝심 외에는 그리 걸출한 장점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 북군 장군이 서부 전선에서 남군을 격파하고 빅스버그를 포위하자 리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방어만 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 남군의 여력이 소진되기 전에 결정적 승리를 거둬야 한다. 리는 빅스버그로 지원부대를 보내는 대신 워싱턴을 공격한다는 대담한 승부수를 띄웠다. 어쩌면 이것이 남부엔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최후의 기회일 수도 있었다.

리의 목표는 워싱턴이었지만, 워싱턴을 직격하려는 계획은 아니었다. 리는 워싱턴으로 향하는 직진 경로를 잡지 않았다. 그의 계획은 워싱턴을 서쪽으로 우회해서 워싱턴 북쪽으로 100㎞ 더 북진한 다음 180도 회전해서 워싱턴을 북에서 침공하는 것이었다. 리가 북진하면 북군도 남군을 추격해 올 것이다. 남군은 북군을 끌고 다니다가 남군에게 결정적인 지점에서 북군을 맞아 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만약 리가 워싱턴으로 직진한다면 북군은 남군의 예상 진로를 파악하고, 북군이 선택한 장소에서 싸움을 걸어올 수 있다. 병법에서 철칙이 자신이 선택한 장소, 자신에게 유리한 장소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무패의 전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는 아니지만 이런 원칙을 활용했던 덕이었다.

북군 주력을 격멸하면 워싱턴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워싱턴을 지킬 정예부대를 급편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리는 워싱턴을 점령하고 링컨에게서 항복문서를 받을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남군 상황에서 도시를 포위하고, 점령할 만큼 장기전을 할 수는 없었다. 리는 수도에 공황을 야기하고 링컨으로부터 남부의 독립을 인정하거나 그에 준하는 양보를 받아내서 전쟁을 종결하려는 생각이었던 듯하다.

이 구상이 성공했다면, 리는 100% 확률로 남부의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됐을 것이고, 리 대통령은 북부와 남부의 새로운 공존의 틀을 만들기 위해 분투해야 했을 것이다. 리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리의 인기와 국민 정서를 감안할 때 상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기도 어렵다. 리는 잔혹한 사람이 아니었고, 온건하고 합리적이며, 남부인이지만 노예제에 대해서도 집안의 노예들을 해방할 만큼 진보적 견해를 지닌 인물이었다. 오히려 북부의 승리 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그랜트가 정치·사회적으로는 더 보수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리였기에 전후의 타협을 위해서도 북부의 수도 워싱턴을 군대로 짓밟기보다는 명예로운 항복과 양보를 구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다고 생각된다.

영웅과 탕아

남군이 북진하자 예상대로 북군은 허겁지겁 남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리가 우회로를 택한 덕분에 남군의 위치와 이동경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현대인들에겐 이런 상황이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 시대에는 군단 병력의 이동과 위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통신수단을 인력에 의존해야 했고, 미국이란 땅이 대지에 비해 인구밀도는 턱없이 낮았다. 북부에 산다고 해서 다 북부 지지자도 아니며, 북부 지지자라도 북군이 어디에 있는지, 몇십, 몇백 ㎞나 떨어져 있는지, 북군에게 연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모험가 수준의 능력과 야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설사 남군 대열을 보았다고 해도 이 정보를 전하기 위해 말에 올라 북군을 찾아다닐 사람은 극소했다.

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주도권을 쥔 이상 승리의 확률이 높아졌다. 지금까지 유리한 지형을 장악한 상태에서 남군이 북군에게 패한 적이 없었다.

이 술래잡기 전투에서 리가 승리를 확신한 또 하나의 히든카드가 있었다. 북군보다 월등히 우수한 기병이었다. 지금까지 남군 기병은 북군 기병에게 패한 적이 없으며 전술, 기동력과 속도, 모든 면에서 우위였다. 덕분에 기병 지휘관 잽 스튜어트는 남부의 여성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인기남이 돼 있었다.

상대의 움직임과 지형을 파악하는 건 기병의 임무였다. 당시는 지도도 부정확해서 홈그라운드인 북군이라고 해도 주변 지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런데 맹활약을 기대했던 스튜어트 기병대가 우연히 조우한 북군 기병과의 전투에서 패하는 전례 없던 사건이 벌어졌다. 심각한 패전도 아니었지만 자존심이 상한 스튜어트는 명예 회복을 위한 작전을 기획했고, 제멋대로 단독행동에 나서버린다. 적진 안으로 돌입하는 상황에서 남군의 눈과 귀가 돼 줘야 할 스튜어트 기병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스튜어트는 남군의 후방에서 북군을 교란하고 남군의 진로를 가려야 했는데, 정도를 넘어서 동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스튜어트의 이동경로를 보면 그는 아예 북군을 동쪽으로 끌고가 남군에게서 멀리 떼어놓으려는 속셈이었던 것도 같다. 성공했다면 그는 영웅이 됐겠지만, 리에게조차 보고하지 않아 리조차도 불안해지고 전체 작전계획을 변경하게 했다.

전쟁에서 임기응변, 지휘관의 독자적 판단은 늘 논란이 된다. 결과를 떠나서 스튜어트의 독자적 행동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스튜어트의 독자적 행동은 임무형 전술의 범주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임무형 전술이라고 무한한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임무형 전술의 비밀이자 절대적 원칙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에 대한 자율권이다. 목표와 수단의 경계도 모호하지만, 현장에서 지휘관의 판단으로 작전을 변경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상급 지휘관이나 동료들이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는 범주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절대적인 원칙은 아니다. 롬멜도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기 위해 전차 위 무전기를 끄고 독자행동을 벌인 경우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때도 사단에 주어진 목표를 변경한 것은 아니었다. 스튜어트는 목표 자체를 변경했으며, 그나마 아무도 그의 의도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 사건이 남군 지휘관들에게 준 충격과 불안감은 의외로 컸다. 불안해진 지휘관들은 돌발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성급한 판단을 하게 된다.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 안에 있는 국립묘지. (출처: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 홈페이지)
우연과 필연

돌발상황의 첫 희생자는 영웅 리였다. 한 번도 계산 착오를 범한 적이 없던 천재 장군은 아주 훌륭한 전투 지점을 놓쳐 버린다. 펜실베이니아로 진입하던 남군은 작은 강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을 결전 장소로 택했더라면 북군은 강을 건너 남군을 공격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만약 그렇게 됐더라면 미드 장군이 지휘하는 북군은 유사한 전투를 비교해 볼 때, 처참한 패배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군은 그 강을 건너기 전에 갑자기 우회했고 게티즈버그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에 남군의 군단장, 사단장들도 결전 장소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게티즈버그에 다가와서 이곳이 결전 장소라는 예감이 들었어도 구체적인 지침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게티즈버그는 필자도 답사를 해 봤지만, 도시 외곽으로는 담장처럼 이어지는 언덕들이 반원을 그리며 감싸고 있는 평원이다. 누가 어디에 자리를 잡느냐에 전력의 우위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런데 선점해야 할 지형이 의외로 많고 길어서 요충지를 모두 손쉽게 장악할 수 없다. 지형을 파악하고, 적재적소를 과감하고 신속하게 선점하는 것이 승부의 키다.

게티즈버그 전투 1일 차는 양군 부대가 이곳으로 집결하고 있는 상황을 인지하고, 요충을 선점하는 시간이었다. 사실은 이마저도 모호했는데 남군의 사단장, 연대장들은 이 부분에 확신을 갖지 못했으며 리도 명확한 지침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이 모호함, 불안감이 남군 지휘관을 주춤거리게 했다. 반면 북군은 전에 없이 확신에 차서 움직였다. 북군에게는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며, 이 상반된 분위기가 전투를 어떤 양상으로 몰아가게 됐을까.

opinio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