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 단성사 개봉 [김정한의 역사&오늘]

1926년 10월 1일

영화 '아리랑' 광고 (출처: 나운규, 1927,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26년 10월 1일, 서울 종로의 단성사. 조선 영화사에 길이 남을 한 편의 무성영화가 막을 올렸다. 나운규가 각본, 감독, 주연까지 도맡은 영화 '아리랑'이다. 이 작품은 개봉과 동시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암울했던 시대, 민족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아리랑'은 3.1운동의 충격으로 실성한 청년 김영진이 친일파 악덕 지주 오기호를 낫으로 살해하고 일본 경찰에 끌려가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표면적으로는 광인의 복수극처럼 보였으나, 그 속에는 일제 강점기 민족의 울분과 저항 정신이 깊숙이 배어 있었다. 주인공 영진의 광기는 곧 나라 잃은 조선의 현실을 상징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극장은 눈물과 탄식으로 가득 찼다. 특히 영진이 경찰에 끌려가며 아리랑 고개를 넘는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은 주인공과 하나 되어 민요 '아리랑'을 목 놓아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 감동과 공감은 단순한 오락 영화를 넘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인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민족 영화'로 '아리랑'을 각인시켰다.

단성사 앞은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로 연일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 인파를 막기 위해 기마 순사가 동원되는 전례 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관객이 너무 많이 몰려 극장 문짝이 부서질 정도였다. 일부 관객들은 격한 감동에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쳐 상영이 중지되기도 했다.

'아리랑'은 이전의 감상적인 신파극과는 궤를 달리한다. 사실적인 농촌의 비애와 함께 뛰어난 영화적 기법까지 선보여 한국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나운규는 이 작품으로 일약 조선 최고의 영화인으로 떠올랐다. 이후 조선 영화계는 '아리랑'의 성공에 고무돼 제작 편수가 급증하는 등 큰 영향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원본 필름은 현재 유실되어 볼 수 없다. 하지만 '아리랑'은 시대의 아픔을 보듬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전설적인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acenes@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