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제의 먹거리 이야기] 사라져가는 밤의 매력
전호제 셰프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돌아와서 책가방과 도시락을 놓고는 동네 뒷산을 친구들과 뛰어다녔다. 군데군데 밤나무 아래에 떨어진 누런 밤송이는 말라가고 가끔은 작은 열매를 품고 있었다.
더 깊숙한 숲으로 들어가기에는 늦은 시각이라 집으로 돌아오면 커다란 냄비 안에 밤 삶는 냄새가 났다. 특별한 간식 대신 삶은 밤이면 저녁까지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땐 익은 밤을 앞니로 반으로 쪼개 작은 숟가락으로 파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먹다 보면 밤껍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추석 명절이 되면 시장에서 밤은 장보기에서 빠지지 않는다. 명절 연휴 시작부터 한 바구니 생밤을 깎아낸다. 단단한 껍질을 작은 과도로 쳐내고 찬물에 담가 변색이 되지 않게 했다. 여유가 있거나 귀한 손님이 있을 땐 갈비찜에도 밤이 들어간다.
아침부터 울리는 전화에 명절 손님들의 방문도 이어졌다. 오시는 손님상에는 하얀 생밤이 오른다. 오도독 씹는 밤으로 대화는 가끔 조용해졌다.
북적이던 손님들은 한산해지고 단출한 식구 모임만 남았다. 1인 가구가 되니 밤은 추석이 돼야 먹을까 말까 하는 음식이 돼 버렸다.
연휴에 순천의 민속마을에 방문했다. 전시관에는 우리 예전 풍습을 인형으로 전시해 뒀다. 모형이나마 첫 돌상에서 시작해서 혼인상으로 이어지고 인생의 마지막 제사상까지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겨 관찰해 볼 수 있었다.
돌상을 몇번이고 더 보게 되는 것은 그곳에 있던 갈색 모형의 밤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돌상에는 밤을 까지 않고 올려놓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이유는 밤 안에는 가끔 알맹이가 여럿인 경우가 있어 자손이 번성하길 바라는 뜻이라고 한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보는 풍경에는 푸른 숲이 마음을 꽉 채워줬다. 이 중에 밤나무가 얼마나 있을까.
도시의 동네 버스를 타다 보면 '밤나무골'이나 '밤 율'(栗)이 붙어 있는 지명도 많았다. 지명이 아직 살아있는 곳도 있지만 밤나무밭을 차지한 다른 학교나 관공서에 이름을 내어주기도 한다. 예전에 밤나무가 많았다고 한 곳도 실제 이름에서 유래했던 밤나무는 찾기 어려워졌다.
미국에 있을 때 필라델피아에도 '체스트넛 스트리트'(Chestnut Street)가 있었다. 도심에서 이어져 상가와 기념건물들이 이어져 있는 세련된 거리였다. 그 길을 걸어 몇 달을 출퇴근한 적이 있었는데 밤나무는 한그루도 보지 못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우리의 밤나무골처럼 이름만 남아있는 경우였다.
밤나무는 사라져도 가을이 되면 제철 재료로 만든 메뉴에 밤이 빠지지 않았다. 뉴욕에 있을 땐 밤 수프를 만들 때 이탈리아에서 온 껍질이 벗겨진 익힌 밤을 사용했다. 한때 밤 맛 디저트로 인기 있던 몽블랑도 알고 보면 밤으로 만든 퓌레 가공품을 사용한다. 우리도 깐 밤은 진공포장에 팔기도 하지만 가공품은 드문 편이다.
올해엔 동네 어르신이 채집하신 알밤이 꽤 많았다. 가족들은 간단한 율란을 만들었다. 익힌 밤에 꿀로 맛을 더하고 동그랗게 만들고 잣을 꼽아 준다. 잣의 맛이 밤과 잘 어울린다. 예전에는 잣을 하나씩만 꼽아주는 모양이었지만 요즘은 밤 모양으로 만들거나 양과자 식으로 코팅을 해주기도 한다. 잣 외에 계피, 깨로 장식을 해준다.
밤나무는 점점 깊은 숲으로 들어가서 실제 보려면 수목원이나 정원에나 가야 볼 수 있다. 예전처럼 밤나무가 가깝게 있지 않지만 그래도 가을이 되면 생각나는 맛이다. 밤 양갱으로 먹어도 좋지만 시간이 있다면 밤을 삶아보는 건 어떨까. 에어프라이어로 군밤으로 만들 수도 있단다. 최장의 연휴를 보내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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