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 "삶이라는 먼 항해 거쳐 다시 문학의 땅으로" [책과 사람]
'상처와 결별하기' 출간 도종환 시인 인터뷰
다산 정약용의 가르침 "상처와 결별하라"
- 김정한 기자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접시꽃 당신',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등 시집으로 100만 명 이상의 독자에게 절망을 건너는 용기를 건넸던 도종환 시인이 다사다난한 삶의 여정을 지나 다시 펜을 쥐었다.
지난해 연말 시집 '고요로 가야겠다'에 이어 새 산문집 '상처와 결별하기'를 세상에 내놓은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도종환 시인을 만나,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의 문학적 성찰과 자연 속에서 길어 올린 삶의 지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집에 이어 참으로 오랜만에 산문집을 펴냈다. 이번 책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이번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화두는 '상처와의 결별'이다. 우리는 보통 아픔에서 회복된다는 것을 '아프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글을 읽으며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진정한 회복이란 아프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아프게 했던 그 상황, 그 상태와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예전의 자리로 똑같이 돌아가면 결국 상처받는 일이 반복되고, 그것이 마음의 병을 넘어 몸의 병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직장, 가정, 인간관계를 완전히 끊어내고 결별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용기가 필요한 일일 텐데.
▶물론 쉽지 않다. 당장 결별하고 나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 분들에게 내 시 '길이 끝나는 곳에서'의 구절을 빌려 말해주고 싶다. 육지가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넓은 바다가 시작된다. 하나의 길을 용감하게 버릴 때 비로소 다른 새로운 길을 얻을 수 있다. 상처를 주는 상황과 결별한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시련과 상실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자아를 해체하고 더 튼튼하게 재구성하는 과정이 바로 회복이다.
-살아가며 비난이나 조롱, 혐오를 마주할 때 상처받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시인만의 비결이 있다면.
▶오늘날 일인 미디어 시대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남을 비난하고 혐오하는 일이 일상이 됐다. 나 역시 매일 상처를 받는다. 사람들은 나에게 수치나 조롱을 주면 똑같이 모욕으로 되갚아 주려 하지만, 그것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가겠다는 뜻이다. 나를 모욕하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품격 있는 복수는 똑같이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푸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에게는 수치나 모멸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들이 앞에 놓여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동안 삶의 궤적 속에서 주변으로부터 "이제 끝났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고 책에 썼다. 그 순간들을 어떻게 견뎌냈는가.
▶인생은 그리스 서사시 속 오디세우스의 항해와 같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가 전쟁을 치르고, 폭풍우를 만나 난파당하고, 동료를 잃고, 괴물과 마주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저 사람은 이제 끝났다"라고 말한다. 내가 교사직에서 해직되고 감옥에 갔을 때도, 큰 병에 걸려 쓰러진 뒤 깊은 산속 외딴집으로 요양을 떠났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그 모든 난파와 풍랑을 거쳐 결국 살아남아 자신의 고향이자 문학의 영토인 '이타카'로 돌아오는 것이 인생이다. 끝난 것이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책 속에서 언급한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가 매우 인상적이다. 전 세계를 제패한 영웅의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알렉산더 대왕은 수많은 전쟁에서 늘 맨 앞에 서서 적들을 물리친 불패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인도 갠지스강 강가에 다다라 쏟아지는 장맛비를 이기지 못해 철수했고, 결국 병에 걸려 요절했다. 죽기 전 그는 관 밖으로 손을 내밀어 달라고 유언했다. 천하를 쥐었던 손도 갈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빗줄기 하나, 질병 하나에 쓰러지는 나약한 존재다. 이 일화는 집착을 버리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알고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동양의 가르침과도 닿아 있다.
-"집착하지 말고 집중하라"라는 말을 평소 깊이 새기고 있다고 들었다. 두 단어의 차이는 무엇인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자리나 권력, 돈에 집착하면 결국 사달이 나고 파탄에 이르게 된다.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온갖 무리한 짓을 하게 되고, 결국 남들의 비웃음을 산다.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언제든지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음을 늘 염두에 두는 태도다. 반면 집중한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역할과 본질에 온 힘을 쏟는 일이다. 높은 자리에 있고 많은 명예를 누릴수록 언제든 그것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세상살이를 '서유기'에 비유해 설명하기도 했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서유기에서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경전을 얻기 위해 서쪽으로 가면서 끊임없이 요괴들을 만난다. 세상에 나가 보면 마치 요괴 같은 이들과 매일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재미있는 점은 누구나 자신은 정의로운 '손오공'이라 생각하고, 상대방은 물리쳐야 할 '요괴'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손오공(분노), 저팔계(탐욕), 사오정(어리석음)의 모습은 실상 우리 내면에 모두 공존하고 있다. 내 안의 어리석음과 탐욕을 먼저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경청하는 진짜 대화가 가능해진다.
-시인이 아닌 화가의 삶을 꿈꾸었던 학창 시절의 방황이 결국 시의 길로 이끌었다고 들었는데.
▶어릴 때는 화가가 되어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정 형편이 극도로 어려워졌고, 결국 등록금 면제와 취업이 보장되는 국립 사범대학으로 진학하면서 미술의 꿈을 접어야 했다. 꿈이 꺾였다는 좌절감 때문에 대학 시절 내내 방황하며 깊은 고뇌에 빠져 살았다. 그때 선배들이 내 방황 속에서 문학적 기질을 알아보고 나를 문학 서클로 이끌었다. 키르케고르는 시인을 가리켜 "가슴속에 격렬한 고통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것이 입술을 빠져나올 때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불행한 운명을 기꺼이 사랑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마침내 시인이 되었다.
-자연을 관찰하며 인간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는 무엇인가.
▶일 년 중 연두색 잎들이 막 솟아나는 4월 곡우(穀雨) 무렵의 자연을 가장 좋아한다. 눈바람 몰아치는 혹한의 겨울을 앙상한 빈 가지로 견뎌낸 나무들이 마침내 푸른 생명력을 뿜어내는 모습을 보면, 생명이 지닌 놀라운 '회복력'을 깨닫게 된다. 퇴계 이황 선생은 평생 소박하고 은은한 매화를 곁에 두고 사랑하며 제자들에게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가르쳤다. 꽃과 나무 같은 사물을 가까이하며 온전한 지혜에 이르라는 뜻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특별한 날이 아닌, 평범한 날들이 모여 비로소 반짝이는 생을 이룬다는 사실을 묵묵히 보여준다.
-시인으로서 이 세상에 최종적으로 남기고 싶은 아름다운 흔적은 무엇인가.
▶결국은 '사랑'이다.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자 했던 그 마음이 나의 시적 언어로 정직하게 남는다면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흔적일 것이다. 아무리 말로 사랑을 외쳐본들 진정성이 없다면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다. 27세의 나이로 짧게 생을 마감했으나 영원히 사랑받는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혹은 한용운 선생의 시처럼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시 한 편을 온전히 남기는 것, 그것이 시인으로서 남기고 싶은 유일한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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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다채널의 뉴미디어 시대라지만, 책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존재입니다. 책은 전문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부터 각 분야 유명인사와 스타들 및 이웃들의 흥미로운 경험들을 기반으로 탄생합니다. [책과 사람]을 통해 각양각색의 도서들을 만들어낸 여러 저자 및 관계자를 직접 만나, 책은 물론 그들의 삶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