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천 "잠시 멈춘다고 인생과 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닙니다" [책과 사람]

'어느 멋진 도망' 펴낸 나상천 작가 인터뷰

편집자주 ...다채널의 뉴미디어 시대라지만, 책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존재입니다. 책은 전문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부터 각 분야 유명인사와 스타들 및 이웃들의 흥미로운 경험들을 기반으로 탄생합니다. [책과 사람]을 통해 각양각색의 도서들을 만들어낸 여러 저자 및 관계자를 직접 만나, 책은 물론 그들의 삶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나상천 작가 (작가 본인 제공)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걸스데이, 모모랜드 등 유명 아이돌을 기획하고 마케팅 전문로 굵직한 족적을 남긴 나상천이 소설가로 데뷔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배경으로 한 소설 '어느 멋진 도망'을 펴낸 그는 자신의 실제 아픔과 깨달음을 네 명의 인물 속에 투영해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전한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작가의 길을 걷는 새로운 예술적 여정을 시작한 나상천을 만났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아왔는데, 갑자기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가장 큰 계기는 삶의 벼랑 끝에서 만난 공황장애였다. 공연을 앞두고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냈고, 바로 다음 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하루 차이로 겪은 두 번의 상실은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특히 당시 일곱 살이던 딸을 보며 '나마저 죽으면 이 아이는 어떡하나'라는 공포가 엄습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죽음의 공포 속에 살다가 지인의 권유로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 그 길에서 나 자신과 대화하며 삶의 의지를 회복했다. 이 귀한 지혜를 사춘기 딸에게 들려주고 싶었는데, 식탁에서의 대화는 1분 만에 끝나더라.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딸이 좋아하는 춤과 노래를 접목해 뮤지컬 대본을 썼고, 그 서사를 더 구체화하다 보니 소설이 됐다.

-소설 속 네 명의 주인공이 각기 다른 상처를 안고 걷는다. 실제 모델이 있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내가 길 위에서 실제로 만난 분들이다. 아내를 잃은 요리사, 돈이 급히 필요한 유튜버, 계속 오디션에 낙방 중인 가수 지망생, 모종의 사건을 저지르고 도피 중인 무용가 대학생 등 각자의 사연을 가진 이들과 함께 걷고 요리하며 나눈 이야기들이 바탕이 됐다. 재미있는 점은 쓰고 보니 그 네 명의 고민이 곧 나의 20대, 30대, 그리고 현재의 모습이었다는 점이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던 젊은 날의 나, 상실감을 안고 걷던 지금의 내가 그들 속에 모두 녹아 있다. 결국 이 길은 특정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생길을 대변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잠시 명상에 잠긴 모습 (작가 본인 제공)

-'어느 멋진 도망'이라는 제목이 역설적이다. 어떤 의미를 담았나.

▶현대인은 모든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해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때로는 잠시 물러나는 용기도 필요하다. 비겁한 회피가 아니라, 나를 잠식하는 고통으로부터 잠시 거리를 두고 숨을 고르는 '전략적 후퇴'다. 길 위에서 만난 스페인 한 노신사는 나에게 '힘들면 안 가도 된다, 네 체력에 맞게 걸어라'고 말해 줬다. 그 말에 뒤를 돌아보니 나를 도와준 '천사'들이 보이더라. 잠시 멈추고 도망쳐 나온 그 여유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멋진 선택이 아닐까 싶다.

-스토리가 마치 연극이나 뮤지컬의 장면처럼 눈에 그려지는데, 의도한 것인가.

▶서울예술대학에서 극작을 전공했고 졸업 후 극단 생활을 했다. 당시 배우 박희순, 임원희 등이 동료 배우였다. 이들과 함께하며 현장의 감각을 익혔다. 아마도 그때의 경험이 글을 쓸 때 시각적으로 장면이 그려지도록 훈련된 것 같다. 실제로 뮤지컬 대본을 먼저 집필했으며, 이 때문에 플롯이 입체적이고 장면 전환이 뚜렷한 듯싶다. 독자들이 책을 읽으며 마치 산티아고 길을 주인공들과 함께 동행하며 걷는 듯한 현장감을 느꼈으면 하는 데 초점을 두고 집필했다.

-소설 속 셰프 '킴스'는 음식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한다. 본인의 모습인가.

▶그렇다. 나 역시 사람들과 어울리고 좋은 기운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순례길이라는 곳이 그렇다. 같이 밥을 먹거나 차 한잔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게 된다. 킴스라는 인물을 셰프로 설정한 것은 음식을 매개로 누군가에게 치유의 따뜻함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킴스는 내 아픔을 투영한 모델이기도 하지만, 길에서 만난 선배들의 자상한 면모를 합쳐 만든 캐릭터다. 한국인에게 '밥 한번 먹자'는 말은 단순한 식사 이상의 소통과 연대를 의미하지 않나. 그런 정서를 담고 싶었다.

-출간 직후 반응이 매우 뜨겁다. 하루 만에 2쇄, 일주일 만에 3쇄를 찍었다고 들었다.

▶솔직히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다. 요즘처럼 자극적이고 빠른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 큰 사건 사고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내 이야기가 통할까 걱정이 많았다. 지인들도 "스토리가 너무 밋밋하지 않느냐"는 우려를 전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오히려 그 '은은함'에 반응해 주고 있다. '나도 당장 떠나고 싶다', '나를 만난 것 같다'는 댓글들을 보며, 많은 사람이 마음 기댈 곳과 진정한 치유에 목말라 있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것이 반영되어 좋은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보며 큰 보람을 느낀다.

'어느 멋진 도망' (오리지널 제공)

-작가가 생각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진짜 힘은 무엇인가.

▶상상이 현실화되는 경험이다. 저 멀리 보이지 않는 마을은 걷기 전까지는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하지만 매일 아침 운동화 끈을 묶고 한 발씩 묵묵히 내딛다 보면, 어느새 내 신발은 그 꿈속의 마을에 닿아 있다. 젊은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이것이다. 터널 같은 현실이 답답하겠지만, 방법은 그냥 가는 것이다. 33일간 매일 25~30km를 걷는 행위는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득하는 가르침이다. 그 길 끝에서 결국 잃어버린 나를 찾게 된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의 성공과 작가로서의 삶, 두 영역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있나.

▶가요계는 보이지 않는 순위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성공해야 살아남는다는 강박 속에서 늘 불안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짐을 어느 정도 내려놓았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훨씬 평안해졌다. 과거의 아픔이나 치열했던 경험들이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소중한 자산이자 자양분이 되어 글 속에 녹아든다. 잘 쓰고 싶은 욕심보다는 내 아는 만큼 최선을 다해 진실하게 쓰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미 차기작 소설 4편 정도를 써두었다. 존재의 가치에 대해 짚어보는 내용을 담은 이야기들이다. 이번 책을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독자들에게는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면, 일단 신발 끈을 묶고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다. 방안에 갇혀 고민하기보다 햇볕을 찾아 떠나는 행위 자체가 치유의 시작이다. 9월에도 다시 순례길 100km 구간을 걸을 계획이다. 그 길에서 또 어떤 나를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길어 올릴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acenes@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