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억 이사장 "흔적을 남겨야 역사가 됩니다" [책과 사람]

'23년의 발자취, 9권의 여정' 펴낸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인터뷰

편집자주 ...다채널의 뉴미디어 시대라지만, 책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존재입니다. 책은 전문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부터 각 분야 유명인사와 스타들 및 이웃들의 흥미로운 경험들을 기반으로 탄생합니다. [책과 사람]을 통해 각양각색의 도서들을 만들어낸 여러 저자 및 관계자를 직접 만나, 책은 물론 그들의 삶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 뉴스1 박지혜 기자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라종억(78)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이 인생 궤적과 철학이 담긴 기행록 '23년의 발자취, 9권의 여정'을 펴냈다.

이 시리즈는 아시아, 유럽, 미주 등 전 세계를 아우르는 9권의 방대한 기록이다. 단순한 답사를 넘어 역사적 성찰과 지적 확장을 담았다. 특히 독립운동가였던 부친의 발자취와 평양 방문기, 중앙아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 탐구 등 개인사와 민족사가 교차하는 지점이 돋보인다.

라 이사장은 순천향대 명예교수이자 통일운동가기도 하다. 그는 여행을 통해 세계시민으로 성장하는 서사를 보여 주며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제시한다.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시인, 수필가, 여행 작가이자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문화를 통한 지속 가능한 인류애'에 대해 역설했다.

-9권이나 되는 여정을 담은 방대한 작업은 어떻게 시작됐나.

▶어릴 때부터 뭔가를 보존하려는 본능이 강했다. 서너 살 무렵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올 때 살던 집의 흙과 나무껍질을 병에 담아왔을 정도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역사는 사라진다. 조선왕조실록이 우리 민족의 뿌리를 증명하듯, 나 역시 내가 발로 뛴 현장의 기록이 국가의 저력이 된다고 믿었다. 이번 책은 그 본능적 기록의 산물이자, 한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영역을 넘나들며 풍요롭게 살아온 '포트폴리오 인생'의 증거다.

-강제 이주 고려인들을 위한 문화 사업에 매진해 온 이유는.

▶선진국은 단순히 돈이 많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전통을 존중하고 인간관계를 축적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1937년 강제 이주로 얼어 죽은 고려인 1만 7000명의 묘역이 방치된 것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국가가 하지 못한다면 민간이라도 나서야 했다. 단순히 돈을 기부하는 봉사는 한계가 있다. 선의와 행정을 연결하고 가교 역할을 수행해 판을 키우는 것이 진정한 봉사다. 그들이 자립할 수 있게 돕고,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현지 문화 공간에 심는 것이 결국 '문화의 힘'이다.

-책 전반을 관통하는 '통일과 문화'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노래 부르고 춤추는 대중문화 위주의 한류는 한계가 있다. 국민의 도덕성, 생활 풍습, 한글 같은 깊은 뿌리가 알려져야 한다. 과거 코카콜라 문화가 소비에트를 허물었듯, 문화의 힘은 냉전을 끝내는 무서운 도구다. 정권이 바뀌어도 통일 정책과 휴먼 네트워크는 일관성 있게 유지돼야 한다. 나는 문화를 통일과 접목해 '왼손과 오른손의 대화'처럼 상호 협력하는 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전 재산을 털어 통일문화연구원을 운영하며 한글 교육과 의료 봉사에 매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 뉴스1 박지혜 기자

-이번 책을 통해 제시한 '애연문'(愛緣文)은 어떤 장르인가.

▶애연문은 '사랑의 흔적을 기록한 글'이라는 뜻이다. 프랑스어로 흔적을 뜻하는 '트레스'(Trace)와 사랑을 뜻하는 '아무르'(Amour)를 합친 개념이다. 이번 책은 모든 사람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한 컷 한 컷을 수필처럼 썼다. 괴테의 '들장미'나 펄 벅의 '북경에서 온 편지'처럼 위대한 문학도 결국은 개인의 소박한 사랑에서 시작됐다. 거창한 정치적 구호나 명예보다 아내와 다닌 여행지에서의 기록, 손녀의 성장을 바라보는 시선 같은 잔물결이 모여 결국 인생이라는 큰 물결을 만든다. 기억은 주관적이고 쉽게 흔들리지만, 기록은 흔적으로 남는다.

-인공지능(AI)의 활용이 인문학적 기록에 어떤 도움을 줬나.

▶수년간 여행을 다니며 버스 안에서, 혹은 길 위에서 휘갈겨 쓴 메모들이 엄청난 양이었다. 순서도 뒤섞이고 역사적 사실관계도 확인이 필요한 상태였는데, AI 기술이 이 방대한 데이터를 정교하게 분류하고 정리해 줬다. 특히 사진 촬영 장소를 AI가 분석해 정확한 지명을 찾아내고 원고의 맥락에 맞게 배치하는 과정은 경이로웠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본연의 인성을 지켜야 한다. AI는 지식을 줄 순 있지만 인성 교육을 시킬 순 없다. 인간이 창조적인 생각과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AI를 도구로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이번 작업은 아날로그적 감성과 최첨단 기술이 결합해 '사랑의 연속성'을 복원한 사례다.

-'문무겸비'의 소신으로 정치적 유혹을 멀리해 온 이유는.

▶내 좌우명은 빛날 빈(斌) 자에 담긴 의미처럼 문무가 합쳐져야 빛이 난다는 것이다. 플라톤도 레슬링 우승자였던 것처럼, 단단한 신체와 정신이 함께 가야 전인적인 인간이 된다. 아버지는 국가를 위해 정당의 이익을 초월했던 분이었다. 그 고결한 신념을 곁에서 지켜보며 권력의 허무함을 배웠다. 정치는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고 결국 추잡해질 우려가 크다. 나는 통일 문화의 현장에서 사람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문화적 파워시프트'를 지향한다.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태풍에는 쉽게 쓰러지지 않는 법이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소소한 행복을 나누는 것이 정치적 권력보다 훨씬 값지다.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 뉴스1 박지혜 기자

-이번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는.

▶가장 강조하고 싶은 건 '고마운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것이다. 고마움은 길어야 6개월 가지만, 상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면 그 인연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나 역시 아침 5시에 일어나 기도와 성경 공부로 하루를 시작한다. 또한 '반대로 생각하기'를 제안한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을 우리는 부정적으로 쓰지만, 바꿔 생각하면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고 연결된 곳이 많다는 뜻도 된다. 내 삶도 그랬다. 언론, 경찰, 검찰, 기업 등 서로 '강적'이라 부르는 관계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며 살아 왔다. 서로의 필요를 연결해 주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풍요로운 인생이다.

-'한국 문화는 고운 문화'라고 정의한 이유와 그 의미는.

▶미국 문화가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청바지 문화'라면, 우리 문화는 결이 고운 '정(情)의 문화'다. 예를 들어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속담을 보자. 서양식 사고라면 탑을 워낙 단단하게 쌓아서 안 무너진다고 해석하겠지만, 우리 정서는 다르다. 남이 애써 정성을 들여 쌓은 탑이기에 차마 허물지 못하는 것이다. 타인의 정성을 존중하고 공감하는 마음, 그것이 우리 문화의 핵심이다. 물론 '대충대충' 하는 슬립셔니스(Slipshodness) 문화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요리할 때 '적당히', 골프 칠 때 '컨시드'(OK)를 주는 문화 속에는 규격화된 수치보다 사람 사이의 유대와 배려를 우선시하는 따뜻함이 있다. 나는 이런 '고운 정'이 현대 사회에서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가치라고 본다.

-시(詩)나 에세이를 쓰는 정서적 영감은 어디서 얻는가.

▶T.S. 엘리엇은 재능이 모방에서 나온다고 했다. 좋은 시를 쓰려면 우선 남의 시를 많이 읽어야 한다. 영감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모방과 읽기에서 쌓인 내공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시어(詩語) 공부'다. 프랑스어 '루드(Rude)'나 '트라스(Trace)' 같은 단어를 보면 그 자체로 굉장히 시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똑같은 현상도 어떤 단어로 묘사하느냐에 따라 울림이 달라진다. 거친 묘사를 단순한 설명이 아닌 시적인 언어로 치환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 역시 매일 시를 읽고 쓰며 영감을 다듬는다. 우리 인생 자체가 하나의 시(詩)가 돼야 하지 않겠나.

acenes@news1.kr